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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미 테스터는 거리 연주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곡은 얼마 되지 않고, 노래도 별로 잘 부르지 못하죠.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내가 아는 한 최악의 가수’라고 불리는 그는 자신의 노래 실력을 속이고자 이따금 허밍을 섞어 연주할 뿐이죠.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맡아 합니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양하고자, 식비와 주거비, 약간의 용돈을 얻으려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맡아야 했죠. 그는 할렘의 거주자. 1920년대 ‘백인의 거리’ 뉴욕에 사는 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이상한 행운이 찾아옵니다. 별거 아닌 배달일로 꽤 많은 돈을 벌고 오래지 않아 로버트 수댐이란 노인이 그에게 돈을 갖고 다가온 것이죠.


  “근사한 기타 피들이군.”


  노인은 허밍 뿐인(그것도 몇 곡 안 되는) 토미의 연주를 듣고는, 노래를 부르면 거금(토미의 연수입 절반 이상이 넘는 거금)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행운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수댐을 만난 직후, 수댐을 조사 중이던 ‘백인’ 탐정을 만나 ‘수사 증거물’로 예약금을 강탈당하고 만 것이죠. 함께 있던 경찰은 –비록 강압적인 행동은 좋아하지 않는 듯 했지만- 탐정이 토미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모두 털어가는 걸 무시합니다.

  경고를 받았지만, 예약금마저 빼앗긴 토미는 수댐을 만나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뜻을 알게 된 아버지는 자신이 오래전 의지했던 무기(일자형 면도칼)을 주며, 주의하라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 피를 봐야 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일을 마무리 짓고 그 집에서 나와 내게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46 p)


  수댐을 만나, 의외의 사실을 마주한 토미. 이튿날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끔찍한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죠.


  자신의 뒤를 쫓은 탐정이, 사실은 토미의 배달일을 마무리 지으려고(토미가 빼돌린 페이지를 되찾고자) 토미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했던 탐정이 ‘자기 방어를 위해’ 아버지를 쏴 죽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몇 번이나 쐈나요?”

  “생명의 위협을 느꼈거든. 리볼버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쐈어. 그런 다음 재장전하고 다시 쏘았지.” (86 p)


  어떤 불합리도, 1924년의 뉴욕에서는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토미에게 새로운 이름을 안겨줍니다. 과연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하워드 필립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1920~30년대에 활동하고 이른 나이에 요절한 그는 상업적으로 그다지 성공한 작가는 아니었죠.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이름으로 나온 단편집 한권도 없이 오직 잡지 연재 작품과 동인지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그를 사랑한 동료와 후배들은 그의 작품을, 심지어 편지까지 모아서 책으로 선보이며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크툴루 신화’라는 말이 탄생하고, 이후 수많은 작가들이 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크툴루 신화’ 작품을, 그리고 온갖 공포물을 집필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이나 이야기, 또는 그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펼쳐진 여러 작품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크툴루 대계 작품’이라고 불렀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의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크툴루 대계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25년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레드 훅의 공포]라는 작품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죠.


  [레드 훅의 공포]는 러브크래프트 작품 중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의 작품입니다. “나는 프로비던스이며, 프로비던스가 나 자신 I am Providence, and Providence is myself”이라고 종종 말했듯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상당수가 프로비던스나 프로비던스가 있는 뉴저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가 많습니다.


  대부분 대도시라기보다는 고전적이고 복고적인 분위기의 낡은 거리, 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농가가 무대로 등장하곤 하죠. 하지만 [레드 훅의 공포]는 다릅니다. 그것은 1920년대의 뉴욕,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넘쳐나는 도심을 무대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동시에 코스믹 호러인지 아닌지 모호한 느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몽마나 악마가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뭔가의 의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수많은 희생자도 있지만, 크툴루를 비롯한 우주적 공포의 존재가 확연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레드훅이라는 지역에 존재하는 온갖 ‘인간’에 대한 공포가 가득한 작품이죠.


  그것은 러브크래프트가 같은 시기에 뉴욕에 살았던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1924년 3월 아마추어 작가 대회에서 만난 사업가 소니아 H 그린과 결혼하여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러브크래프트는 불과 2년 만에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 프로비던스로 돌아갔습니다.

  둘이 결혼이 막을 내린 것은 가게의 경영부진으로 소니아가 노이로제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브루클린의 도시 생활에 러브크래프트가 염증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작가 친구와 함께 ‘케이렘 클럽’이라는 친목 클럽을 결성하고, 도서관, 미술관 등을 돌아다니며 자극적인 도시 생활에 도전했던 러브크래프트였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뉴욕의 삶에 좌절하고 맙니다. 대도시의 혼란과 소란, 특히 식민지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던 남부의 고향 프로비던스와는 달리, 수많은 인종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그에게 압박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러브크래프트는 고향 프로비던스로 돌아가던 열차 속에서 친구인 제임스 F. 모튼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죠.


  “원래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온 이후, 생각이 얼마나 잘 작동하게 되었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중략) 브루클린의 잡종들 소굴에 삼켜졌던 때에 필요했던 것에 비하면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훨씬 괜찮은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F. 모튼에게 보낸 편지. [크툴루 신화 대사전 중])


  ‘브루클린의 잡종들......’


  그가 이렇게 표현했던 존재들. 그들은 사실 러브크래프트보다 오래 전부터 뉴욕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레드 훅의 공포]에서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그들을 크쿨루 같은 미지의 존재, 아니 악마나 몽마 같은 끔찍한 존재로서 그려냅니다.


  “너희 인종은 지저분한 혼혈인들로 얽히고설킨 미로 속에서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그걸 바꿀 수 있다면?”(97 p)


  온갖 인종의 홍수로 가득한 집... 여기서 로버트 수댐 노인은 말합니다. ‘왕’(물론 르뤼에에 잠들어 있는 크툴루)가 와서 이 모든 불합리를 때려 부수고 세상을 바꾸어 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환성하지만, 토미는 공포를 느낍니다. 수댐이라는 존재가 또 다른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그는 괴물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괴물이 되고 싶었을까요? 아니, 정말로 괴물이었던 것일까요?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저서 ‘공포문학의 매혹’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인간의 감정은 공포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것이 바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 ‘미지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로 완성해나갔죠.



  [레드 훅의 공포]는 그가 뉴욕에 만난 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잡종들’로 가득한 브루클린의 거리에서, 그가 두려워했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죠.

  러브크래프트는 그의 믿음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괴물들’로부터 도망쳐 친숙한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며, ‘내가 곧 프로비던스’라는 말과 함께 살아갔죠.


  [블랙 톰의 발라드]는 러브크래프트가 ‘잡종들’이라 부르며 미지의 존재로서 두려워했던 ‘괴물’의 이야기입니다. ‘괴물 그 자신의 이야기’이죠. 그리고 우간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싱글맘 슬하에서 자라난 빅터 라발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1924년 토미는 ‘백인의 정당 방위’로 아버지를 잃고 괴물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21세기인 지금 미국에서도 벌어지는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평범한 한 청년을, 아버지를 위해 노력하던 청년을 괴물로 바꾸어버린 현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상황... 러브크래프트의 [레드 훅의 공포]보다 [블랙 톰의 발라드]가 더욱 끔찍하고 무서운 것은, 바로 그런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오가는 현실이야 말로 어떤 점에서 러브크래프트가 가장 두려워했던 ‘우주적 공포’의 현장이니까요.



  마지막, 이 작품의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번역은 매끄럽고 읽기 편하지만, ‘레드 훅의 공포’와 비교해 보면, 뭔가 맞지 않는 게 있기 때문이죠. 로버트 쉬담([레드 훅의 공포]), 로버트 수댐([블랙 톰의 발라드])처럼 양쪽 고유명사에서, 맞지 않는 게 약간 보입니다. 번역자는 다르지만, 똑같이 황금가지에서 번역한 만큼, 이런 점에 좀 더 신경 썼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인용문을 보면, 번역자가 [레드 훅의 공포]를 본 것 같은데 말이죠.)

  최근 [크툴루 신화 대사전]을 번역하면서 온갖 판본에서 온갖 번역이 존재하며, 같은 용어도 여기저기 다른 것이 정말로 골치 아팠습니다. 물론 Cthulhu(크툴루) 같은 이름은 딱히 통일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왕의 이름은 인간이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 밖의 고유 명사라면... 앞으로 한국에서도 크툴루 신화 대계의 ‘코스믹 호러’를 다룬 작품의 인기가 높아지는 만큼, 이런 부분에도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더 완벽한 번역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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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제리 퍼넬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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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작품이죠. 현대의 군대가 외계인에 의해서 저 멀리 중세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세계에 간다는 점에서 ‘이고깽‘처럼 착각할지 모르지만, 굉장히 사실적이면서도 깊이있는 연출이 재미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면 정말로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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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8 : 라이트 노벨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8
전홍식.이도경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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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노벨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라이트 노벨 이야기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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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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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숨을 쉴 없을 만큼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작품. SF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는 점에 더욱 무서워진다. 게다가 뭔가 도움도 되는 작품. ˝빅브라더 세계의 생존 매뉴얼˝ 정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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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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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에서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셜록 홈즈의 베이커 거리로 향하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홈즈는 –한창 [바스커빌 가의 개] 사건을 해결하느라- 거리에 없지만, 홈즈가 살아있던 그 세계에서 모리어티와 대면하고, 아일린 애들러를 찾으며 당대의 살인범 잭 더 리퍼에 맞서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 베이커가를 방문한 아이들. 홈즈는 없지만, 이 장면만으로 즐거움이 느껴진다. ]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셜록 홈즈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이자 캐릭터이다. 코난 도일만이 아니라 수많은 작가가 그를 연출하고 영화나 만화에도 무수하게 등장하며 패러디와 오마주가 쏟아지는 존재. 만들어진지 130여년. 추리 소설 역사 속 수많은 탐정 중에서도 유독 그가 사랑받는 것은 코난 도일이 엮어낸 셜록 홈즈가 가상 현실 게임 속에 당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전체가 살아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홈즈를 통해서 우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으로 날아가 당시의 풍습을 접하며 기묘한 사건과 범죄자,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 열성팬이 아니라도 쉽게 접하고 읽을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홈즈와 왓슨이 실재하는 또 다른 영국, 베이커가를 탐험하고 즐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분명히 홈즈는 매력적이며 왓슨도 그렇지만, 그 세계의 수많은 이들은 스쳐 지나가듯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왓슨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단면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홈즈에 얽힌 사건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 홈즈가 없을 때의 허드슨 부인이나 형사들은 뭘 하고 있으며, 아이린 애들러나 바이올릿 헌터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심지어 왓슨조차 사건이 없을 때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를 추측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셜록키언(아님 홈지언) 수준의 팬이 아닐지라도, 수없이 많은 홈즈 얘기를 보다보면, 사건만이 아닌 다른 부분도 알고 싶어지는 법.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 ‘셜록 홈즈 작가’로 선정한 앤터니 호로비츠가 집필한 [모리어티의 죽음(원제:Moriarty)]은 바로 그런 팬심을 채워주는 즐거운 작품이다.


  [모리어티의 죽음]은 제목 그대로 1891년 5월 4일. ‘범죄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린 홈즈의 숙적 모리어티가 라이젠바하의 폭포에서 떨어져 죽은 바로 그 날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독자들은 물론 홈즈가 죽지 않았음을 알지만, 이 시점에서 홈즈 세계의 모든 이는 모리어티와 홈즈가 함께 죽었다고 알고 있는 상황. 당연히 홈즈도, 왓슨도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홈즈 세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이라는 것. 당연히 사건은 터지고, 그 사건을 해결할 탐정역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홈즈 스타일의 작품이라면 당연히 필요한 왓슨 역의 인물도.


  여기서 작가는 두 사람의 인물을 주역으로 선보인다. 미국의 유명한 핑커턴 탐정 사무소에서 왔다는 탐정 프레더릭 체이스. 그리고 홈즈가 항상 ‘사건이 벽에 부딪쳤을 때만 찾아온다.’라며 비웃던 스코틀랜드 야드의 ‘바보’ 경감 애설니 존스...


  홈즈 시리즈를 한번이라고 읽어본 사람이라면, 특히 애설니 존스가 나오는 [네 사람의 서명]을 읽어본 독자라면 당연히 프레더릭 체이스가 탐정역이고, 애설니 존스가 왓슨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상과 달리 홈즈역은 바로 애설니 존스.


  왓슨의 표현에 따르면, 회색 양복을 입은 풍채 좋은(더 정확히는 뚱뚱한) 사나이. [네 사람의 서명]에서 등장하자마자 목쉰 듯 걸걸한 목소리로 홈즈에게 “그게 무슨 훌륭한 이론 덕분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였다는 걸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소?”라고 비아냥거리며, 홈즈로부턴 “재치 있는 사람들만큼 까다로운 바보는 없다!”라는 독특한 비평을 들었던(그리고 당연히 사건해결엔 도움이 안 된) 그 사내가 홈즈가 없는 지금, 처참한 범죄에 마주한 탐정역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홈즈 세계의 위기, 아니 절망의 순간이지만, 오랜 만에 등장한 애설니 존스는 심정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살이 빠져 외모도 바뀐 데다 홈즈 방식을 연구하여 상당한 성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한다.(그가 변하게 된 계기는 책의 마지막에 추가된 단편, [세 명의 여왕]에서 소개된다. 왓슨이 쓴 홈즈의 이야기니 홈즈팬에겐 이쪽을 먼저 보고 싶겠지만, 가능한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걸 권한다.)


  처음 체이스를 만났을 때 한 눈에 그의 출신과 유럽에 온 이유, 게다가 사는 곳과 미혼이라는 사실까지 맞추는 장면에선 일찍이 왓슨이 홈즈를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할 정도. 홈즈의 방식을 배우겠다며 홈즈의 글을 모두 섭렵한 그의 능력은 대문자와 소문자만으로 된 복잡한 암호문조차 –홈즈보다 시간은 걸렸을지언정- 해독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홈즈처럼 어떤 추리를 하는지 마지막까지 감춤으로서 파트너인 체이스와 독자인 우리를 약 올리는 상황에 이르면, 가히 미니 홈즈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 140가지 담뱃재를 구분할 수 있다는 홈즈와 달리 ’90가지 밖에 터득하지 못했다’라는 겸손(?)에선 ‘괄목상대(刮目相待)’의 진정한 뜻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미국에서 달려온 체이스의 목적은 미국의 범죄계를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거물, 클래런스 데버루의 추적. 첩자를 통해 데버루가 모리어티와 손잡으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영국으로 온 그는 스위스에서 시신을 마주하고 망연자실하지만, 때마침 찾아온 애설니 존스의 도움으로 수상쩍은 편지를 발견하고 추적을 시작한다.


  홈즈 2호를 연상케 하는 존스의 활약으로 상황은 급진전되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사건은 그 이상으로 힘겹고 위험하며 끔찍하게 전개된다. 겨우 찾아낸 데버루의 측근이 참살되는가 하면, 폭탄 테러로 런던 경시청이 엉망이 되고, 심지어는 존스의 딸이 납치되는 상황. 데버루를 찾아갔던 미국 공사관의 항의로 해고 직전에 직면한 사소한(?) 위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벼랑으로 몰리게 되지만, 체이스와 존스 두 파트너는 끈질기게 사건을 파고들며 거대한 범죄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


  홈즈가 없는 자리에서 어쩌면 모리어티 이상으로 위험한 범죄의 거물을 상대해야 하는 애설니 존스와 프레데릭 체이스. 홈즈가 없는 홈즈 세계 속에 등불과 같은 두 사람의 발버둥은 참 흥미롭지만, 그 이상으로 재미있는 건 이 모든 이야기가 정말로 홈즈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애설니 존스나 레스트레이드 같은 본래의 인물만이 아니라, 도일 작품엔 등장하지 않았던 애설니 존스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모두 ‘홈즈’의 이야기에 어울리면서도 그들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왓슨이 ‘평소엔 사교적이며 식사 자리에선 유머스럽다.’라고 했던 애설니 존스의 가족 만찬 장면에선 홈즈 얘기에선 보기 힘든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도 느껴질 정도. 그만큼 [명탐정 코난]의 가상 현실 게임처럼 홈즈 세계에 뛰어 들어가, 어딘가에 홈즈와 왓슨이 살아가는 그 세계, 베이커가를 여행한다는 현실감이 확 풍겨 오른다.


  앤터니 호로비츠의 첫 홈즈 이야기, [실크 하우스의 비밀]이 코난 도일이 아닌 다른 사람도 왓슨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면, 이 작품 [모리어티의 죽음]은 왓슨의 이야기만이 홈즈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앞으로 더욱 다채로운 홈즈 세계 이야기를 접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프레데릭 체이스의 손으로 기술된 애설리 존스의 이야기가 나를 매료시켰듯, [명탐정 코난]의 가상현실 이상으로 풍성하고 살아있는 홈즈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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