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스캔들 - 누구의 그림일까?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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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석대에게 어릴 때 집을 나간 엄마는 공백이었다. 그래서 엄마 얼굴을 그리라는 미술시간, 책상 위에 놓인 손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하얀 도화지가 차라리 그에겐 엄마의 얼굴에 가까웠으리라. 한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얼굴과 마주하고 앉은 어색한 시간에서 그를 풀어준 건 한병태 였다.


"반장, 내가 하나 그려줄까?" 엄석대는 '네가 그린 것을 나를 주고, 너는 새로 하나 그리'라 한다. 한병태가 그린 엄마 얼굴은 엄석대의 이름표를 달고 학급 게시판에 걸린다.


엄석대는 한병태가 그린 엄마 얼굴을 자신의 엄마 얼굴로 반 아이들 앞에 공개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리라. 엄석대는 한병태에게 이렇게 말한 사실이 있다. "너희 어머니, 참 미인이시더라." 이 말 속에서 엄석대가 품고 있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한병태 어머니의 모습과 가까우리라는 점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한병태가 도화지 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는 것은 동시에 엄석대가 가진 어머니의 개념을 화폭 위에 재현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현대 미술에서 개념적 구상과 물리적 실행의 분리는 자연스러운 개념이 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엄석대가 한병태 어머니의 초상을 (이제는 엄석대 어머니의 초상이라 해야 온당하리라) 자신의 작품으로 학급 게시판에 전시하는 일 역시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실제로 학급 구성원 그 누구도 '한병태가 그린 그림 아니냐'며 따지고 들지 않는다.


1959년, 대한민국 산골 어딘가의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그 시절, 국민학교 5학년생들도 알고 있는 '현대 미술에서 개념과 실행의 분리가 의미하는 바'를 2016년 대한민국의 알만한 사람들이 모르고 있거나, 받아들이길 거부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책을 읽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만 저자는 '일반 대중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다 치고, 문제는 '일부' 작가들이 드러낸 처참한 미의식의 수준이다'(p237)고 하였는데, 나는 일반 대중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반 대중이 조영남 사건에 그토록 큰 분노를 드러낸 이유는 다음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1) 미술사(미술의 역사)에 대한 교육 부재

2) 평가를 목적으로 한 실습 위주의 미술 교육


앞서 엄석대가 한병태가 그린 그림을 자신의 이름으로 학급 게시판에 전시했고, 학급 구성원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반응과는 별도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그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으리라. (이문열 원작,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왜냐면 '남이 그린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고 속여서 제출하는 건 나쁜 일이니까'. (실제로 내신 성적이 중요해 진 요즘에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 났다면 내신 성적 비리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민국에 사는 대부분의 성인들은 초중고 12년에 걸친 교육 과정 동안 자신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것들을 제출하고 평가를 받는 일에 익숙해 진다. 그리고 그 12년은 절대 바뀔 일이 없는 부동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반칙 금지. 12년에 걸쳐 내가 그린 그림이 뛰어난 지, 남이 그린 그림이 더 우수한지를 비교하며, 비교 당하며, 성적 매김을 경험해 온 우리들에게, 남이 그린 그림도 내가 그린 그림이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현대 미술의 개념은,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듯한 찜찜함이 함께 한다.


사실 조영남 사건은 이렇게까지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만드는 대형 스캔들로 번지지 않을 수 있었다. 12년의 초중고 교육 과정 속에서 미술의 역사(미술사)나 현대 미술의 흐름에 대한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래서 현대 미술에서는 실행은 다른 사람이 할지라도 개념을 제공한 사람의 저작권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화가들, 미술평론가들, 미술관협회 등에서 이번 사건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문제로 보고 '조영남은 제대로 된 화가가 아니며, 대작이고, 유죄다'고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궁색한 논리로 여론을 호도하더라도, 대중들은 유효기간이 끝난 케케묵은 논리에 넘어가 함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검찰이나 언론까지 이 논쟁에 뛰어들어 사건을 키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국영수 교육이 중심이 되는 대한민국 초중고 교육 과정에서 미술은 음악, 체육과 함께 예체능으로 구별되어 국영수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아이들을 잠깐이라도 자연 속으로 돌려놓은 것에 중점을 두는 모양이고, 수업 시수도 부족한 상황이기에, 미술 교사들이 의욕이 있더라도 자칫 또 다른 암기 과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미술사(미술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초중고 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이후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치게 된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해 낸 그 위대한 업적들(수학, 과학, 음악, 미술의 역사)에 관하여 공부하지 않고서 우리는 12년이란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익히느라 그토록 애를 썼던 것일까. 잠까지 줄여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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