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 베를린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채혜원 지음 / 마티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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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마지막 학기에는 정말로 내가 배우고 싶었던 수업을 듣자 싶어서

'서양 현대사의 이해' 과목과 '정치사회학' 과목을 들었다. 전자는 사학과 전공 필수였지만, 후자는 과목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정치학, 사회학에 집중된 과목이었다.

때문에 두 과목의 결은 달랐지만, 위 두 과목에서 얻은 깨달음은 하나의 방향성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연대하는 여성과 국가를 초월한 페미니즘 운동


서양 현대사 수업을 담당해주신 교수님은 이주, 독일사를 깊이 연구하신 분이셔서

수업은 서양으로 넘어간 이주민의 역사와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이주 정책 등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4년 전, 같은 교수님의 다른 수업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예 과목명이 '글로벌 이주의 역사' 였던 만큼 강의를 통해 이주와 관련된 심도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수업에서 보여주셨던 '알마냐:나의 가족 나의 도시'라는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 이민자들을 다룬 영화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주의 역사에 대해 (수업을 한 번 들을 것 치고는) 꽤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읽고나니 내가 왜 그렇게 이주라는 테마에 관심을 갖게 된 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이주하는 주체에 관한 나의 관심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약 30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챕터는 #여성공동주택 #퀴어가족 #난민운동 #여성파업 등 독일에서 발생한,

그리고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혐오와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운동 등을

어려운 단어가 아닌 실제 독일에 거주하는 저자의 지인들의 예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알 수 없는, 알 수 없어서 외면하지만 알아야하는,

실제 이주민, 여성, 퀴어, 전쟁 피해자 등 다양한 소수자의 삶을

저자가 직접 겪었거나 저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마치 내가 그들의 지인인 마냥 부당한 처사에 분노하고, 연대에 힘 얻으며, 선언에 공감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과목 중 다른 하나, 정치사회학 수업은 유명한 서양 사회학자의 이론에서부터 전세계의 정치를 아우르는 폭 넓은 수업이었는데 별도의 시험 없이 마지막 주차까지 각자 자신이 연구하고 싶어하는 대상을 연구해서 발표해야했다.

한창 우리나라 낙태죄 폐지가 이슈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는 낙태법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다.

입헌예고 게시글의 댓글을 분석해 우리 나라에서 임신 중절이 합법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혐오자들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데이터마이닝을 통해 도출하고,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들을 분석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관련 논문도 많이 찾아 봤지만 동시에 해외 사례, 특히 폴란드와 아일랜드 등 유럽의 사례를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의 낙태죄 폐지 여성운동가들과 유럽의 여성운동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으며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에게 연대하며 힘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유럽낙태여행>이었는데 이 책 덕분에 유럽에 직접 살지 않고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서양의 낙태 역사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유럽낙태역사>에 이어서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읽으면 서양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여성운동가 한 명 한 명의 삶을 따라 쫓아가는 듯 알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독일의 페미니즘 운동과 그 곳의 페미니스트, 그리고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하지만 그보다 이 책을 더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실제로 독일로의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이다.

이 책이 단순한 에세이가 아닌 이유는 정보 전달이라는 실용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1년 반동안 연고도 없는 캐나다의 중소도시 캘거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얼마나 팍팍했는지,

공감대를 꾸리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여성 모임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기억한다.

물론 나는 우연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그들과 교류할 수 있었지만캘거리보다 더 작은 규모의 도시, 혹은 여성인권을 논할 수도 없는 보수적인 도시에서 거주하게 될 여성들의 막막함을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 페미니즘 서적 등이 존재하고 있다.

베를린으로의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여성들의 막막함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 아카이브 자료실 FFBIZ, 여성공동사업체 힝켈슈타인 인쇄소, 그리고 저자가 소속되어있는 International Women Space 등..

실제 베를린의 퀴어 프렌들리 지역과 펍, 여성거주공동체 등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베를린으로 이주를 생각하는 여성들에 대한 부러움을 느꼈고, (마치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시리즈와 같은 유용함 감탄하며)

내가 나중에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 그때는 이민을 꿈꾸고 현지 페미니스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게 된다면 나도 반드시 국문으로 이런 책을 쓰리라, 나 이후의 여성들은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여성 공동체와 소수자 안전지대를 찾아갈 수 있도록 지도도 첨부하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약 300p 가까이되는 책을 덮으며 마치 가보지도 않은 베를린 시내 곳곳을 쏘다니고,

그 곳에서 지금도 생활하는 여성운동가들을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카메룬에서 온 도리스, 케냐에서 온 난민 인권운동가 제니퍼 등 저자가 익숙하게 부른 이름들이

서울에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일을 하는 내게 부쩍 가까이 다가온 기분이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도 독일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 이 책을 한 권 선물하며 언젠가 이륙할 비행기에서 읽어보기를 권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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