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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의 검은 표범
아모스 오즈 지음, 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지하실의 검은 표범을 보았을 때 크기도 작고 페이지도 많아 보이지 않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전공서적도 아니고 어려운 논문도 아닌데 잘 읽혀지지가 않는다. 하얀건 종이요, 까만건 글자라~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진도가 안나가고 이해할 수 없는건 오래간만이었다. 한마디로 난감했다. 문화가 달라서일까. 생소하고 낯선 단어들, 이해할 수 없는 사고 방식, 시간순 대로 이어지는 전개도 아니고, 화자의 기억은 이리저리 뛴다. 하루에 몇장 넘기다 책장을 덮길 여러차례로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을 때도 내가 지금 뭘 봤는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도 되지 않아 곤혹스러울 뿐이었다.(후에 나만 이런 기분인가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비슷한 것 같아서 조금 안심했달까;)
아무튼 기왕 이렇게 된거 한번 읽어서 안되면 계속 반복해서 읽어보자고 마음먹고 다시 지하실의 검은 표범에 도전을 했다. 책을 처음 읽었을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꼭 자막없는 무성영화를 보던 것 같던 느낌이 소리를 내며 내 의식속에서 점점 침투했다. 이 책에는 독특한 캐릭터, 소재, 극적인 반전이나 충격적인 결말처럼 독자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게 하는 요소는 없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잔잔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영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 주인공 프로피는 어린아이 특유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칠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똘똘뭉친 아직 어린 유대인 소년이다.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학구열이 뛰어나고, 언뜻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소심하기도 한 고민 많은 이 어린 주인공은 그를 포함해서 단 세명으로만 이루어진 비밀지하조직의 조직원이기도 하며, 영국인 던롭경사와 의도치 않는 우정을 쌓아 배신자로 불리고 있었다. (처음 이 책의 소개만을 보았을 때는 나는 주인공이 이런 어린아일지는 생각도 못했다. 배경설명과 유년시절이 조금 나오다가 청년으로 변한 주인공이 피비린내나는 지하조직에 가입해서 싸우다가 적과 우정을 쌓으며 혼란을 겪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그런 하드보일드액션드라마일 줄 알았지; 주인공이 청년이었다면 그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문득 들지만 지금의 소년을 내세운것도 꽤 의미심장하다.)
부모님과의 일, 던롭경사와의 만남, 비밀조직 아이들과의 불화, 야르데나, 라자루스씨, 선생님, 고아들...여러 사람들과 거쳐가며 소년은 성장해간다.
이 이야기가 전쟁이나 민족간의 다툼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누군가를 계몽하려거나 가르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소년의 자서전이랄까, 흡사 일기같은, 그 시절에 그렇게 느낀 것을 담담하게 서술할 뿐이다. 나는 한발자국 떨어져서 이야기를 보고 있지만 주인공의 생각을 보면서 어이없음과 동시에 가슴이 막막해 지기도 하고, 부조리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리움 같은 감정이 떠오르기도 했다. 같은 인간일 뿐인데 왜 인간은 정치, 경제, 종교적 신념 등등을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을 벌이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겉표지에도 나와있는 문구이자 판결 후 벤 허가 프로피를 배신자라고 낙인찍으며 했던 대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