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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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흔히 역사를 배울 때 조선시대의 당쟁은 망국의 병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조선말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합병과정을 거치게 되는 주 원인으로 당쟁을 꼽는다. 하지만 이조 조선은 500년이라는 긴 역사적 시간을 유지한 보기 드문 왕조였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긴 역사를 유지한 왕조다. 이런 긴 시간동안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 될 수 있었던 주 요인이 문치주의 행정이었으며, 이런 문치주의가 유지되도록 권력 분배가 안정성을 유지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당쟁이라면 아이러니일까.


조선의 당쟁사의 기원을 이 책에서는 조선 개창기의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이 당쟁 시작 부분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당쟁 기원에 대한 한국적인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고려말부터 조선개창기까지 주요 관직의 가문들을 추적해보면 그 핵심 가문들은 변하지 않았다는게 들어난다(<조선왕조의 기원>에서 고려시대 자료가 부족하여 전체 관료의 절반정도 확인되었지만). 우리가 조선이 개창하면서 분명 지방사족들이 큰 역활을 하고 조선초 정권창출에 지대한 역활을 했다고 인식하지만 실제 조선 관료 시스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당쟁의 시작과 격화는 조선에 이식되는 유교의 심화도에 따라서 격화되었으며 그 이행과정과 본질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와그너 교수의 논의에서도 보여지지만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새로운 관료들의 자유로운 등용과 고속승진을 위한 관문이었다(비록 닫힌계 안에서 귀족계층간의 관계 진출을 위한 열린 통로 역활을 했을지 모르지만).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음서제도는 고위 관리집안이 지속적으로 관료로 등용되어 쇠락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음서 제도를 통해서 관료진출이 용이했을지 모르지만 고위직으로 승진하거나 핵심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승진을 위한 하나의 관문이 존재함으로써 기존 당파적, 파당적 인물들로만 채우기 위해서 혈투를 벌이는 당파싸움에서는 불리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조선 관료층의 주요 핵심 문벌들은 흥망성쇄를 거칠지언정 크게 변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서로간 통혼을 통해서 세력을 공공히 하였고 그들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와그너 교수의 연구에서 들어났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북지방에서 대거 과거 합격자들이 등장한다. 이는 당파적, 지역적, 정쟁적 투쟁을 통한 당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서북지역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한 것이다. 이는 이례적이고, 이 현상에 대해서 책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이들이 당파적 투쟁 과정에서 어떤 역활을 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분명 지역적 색채에 묶이지 않고 당파적 투쟁 과정에서도 주요한 역활을 하지 않았을 듯 하다. 게다가 18세기 중반 경화사족 중심의 정계진출은 지역 특색과 학문 특색을 강조하던 당파 싸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경화사족들은 지방에서 부재지주의 역활을 하면서 오직 중앙 진출을 위한 노력에 경주했다. 이에 따른 부작용을 지방에 존재하던 많은 양반들이 관직 진출 기회가 줄어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당쟁은 지역적, 유교적 해석 차이로 인한 심화 과정을 거쳤다는 논의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조선중기로 들어서면 주자학에 대한 해석이 독자적 체계를 넘어서 교조적 해석으로 이행된다. 이런 대표적 사례가 송시열일 것이다. 그는 문인으로써 정치인으로써 가장 교조적 입장을 유지한 사람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진행했었던 주자학의 교조적 해석은 당파성에 있어서도 경직되고 융통성이 배제된 보수적 강령들이었다. 이런 보수적 경직된 유림의 고착화에 따라서 당쟁도 심화되고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기가 되면 당파적 파워 게임은 외척의 득세에 따라서 쇠락하고 그 힘을 잃는다. 조선 망국의 원인은 삼정의 문란과 정치적 혼란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선을 유지하던 균형과 견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시스템 자체가 이완됨으로써 그 자체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추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외부의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는 하부층, 즉 대농장을 유지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조선 양반계층의 몰락을 촉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한 것을 본다면 조선의 구조적 모순들, 특히 보수적 이념인 유교의 작용은 조선말기의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기득권, 권력층의 지배 원리는 도덕적 우위였다. 그들은 유학을 함으로써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도덕적으로 깨끗함으로 하위계층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권위가 조선말기가 되면 쇠락하는 유학 때문에 결국은 그들의 통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외척이 득세하는 가운데 유학은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 당파적 갈등은 소멸(유학적 소멸)하고 외척의 득세가 이런 구도에 맞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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