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가슴울새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 위즈덤북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진홍빛으로 포장된 예쁜 표지를 펼치더니 아이는 금새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이모, 이거 내가 아는 얘기야.' '그래? 어떡하지. 너 언제 그걸 다 읽었어?' '아니, 내가 읽은 건 아니고 교회에서 들은 얘기거든.'

아,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래간만에 선물이랍시고 내놓은 책 한 권이 무색해질까 걱정스러운 순간, 첫장을 펼쳐 놓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아이는 이야기 도입부에서 익히 들었던 성경의 창세기를 떠올렸나 보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텅 비어 있는데, 깊은 어둠 위로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은 빛을 낮이라 이름 짓고, 어둠을 밤이라 이름 지었다.'

<닐스의 신기한 모험>으로 여류 작가로서는 세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셀마 라게를뢰프의 원작 <붉은가슴울새(셀마 라게를뢰프 저 / 이동진 편 / 위즈덤북 펴냄)>는 어른이 읽어도 잔잔한 감동이 남는 서정적 이야기이다.

이름은 '붉은가슴울새'이지만 이 새에게는 붉은 색의 털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있지 않았다. 울새는 자신을 만든 하느님께 왜 '붉은가슴울새 '라고 지으셨는지 여쭈어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마음가짐 하나로 붉은 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붉은가슴울새는 가슴에 붉은 털을 얻기 위해 가슴이 불탈 만큼 사랑도 해 보고, 뜨거운 노래가 가슴 털을 붉게 물들여주지 않을까 노래도 불러보고, 가슴에 타오르는 투지로 용감하게 싸워도 보았다. 하지만 가슴엔 희망과 용기가 조금 자라날 뿐, 정작 원하던 붉은 색의 가슴털은 생기지 않았다. 이 울새는 결국 붉은 깃털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십자가에 묶인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고서야 붉은 털을 갖게 된다.

세상의 온갖 색깔들을 불러 모은 듯한 다양한 색감의 그림은 수채화풍의 느낌으로 이 이야기의 어조와 잘 어울려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그림과 글의 비율이 엇비슷하게 맞아 떨어지는 그림책과는 달리, 글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동화이니만큼 이책의 그림은 조연급으로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따스한 색채의 여운은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따라잡는, 그래서 아이들이 '그냥 가슴 울새'가 기필코 '붉은 가슴 울새'가 되고 말것이란 기대와 믿음을 놓지 않게한다.

너무나 당연한 장치임에도, 이 훌륭한 글과 그림의 조화에 나는 또 한번 혀를 내두른다..어쨌거나 ,그 조화의 아름다움과는 별도로 이 잭에서 그림은 삽화 정도의 역할로 좁혀져있어, 그림책을 주로 보는 유아들의 색감 발달에는 제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또는 그 이후라면 굳이 연령을 따질 게 무어람... (나처럼 아이의 가슴과 머리로 사는 어른들에게 직격탄을 날릴 수 있다면...)

붉은가슴울새가 마음가짐에 관한 숙제를 푸는 동안은 아이도 붉은가슴울새가 된다. 붉은 깃털을 위해 열심히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동안 아이의 마음 속에 중첩된 여러 감정은 엄마 울새의 입에서 나온 실패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씨앗을 심게 된다. '사랑하는 것, 노래하는 것, 싸우는 것 말고 또 무슨 방법이 있지?'

아이는 하느님의 말씀하신 마음가짐이란 희망과 용기보다 더 큰 뭔가가 있을 것이란 희미한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붉은 깃털을 가지려는 울새의 노력은 마침내 가시관을 쓴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에 이른다. 습관적으로 물었던 질문을 던질 수 없었던 건 아이의 눈망울에서 잠깐 반짝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이 좋은 책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재미' 속엔 단순히 아이의 유희를 충족시키는 놀이로서의 감정만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감성의 씨앗이 움튼다.

이 책은 이제 막 그림책을 떼내고 좀더 많은 활자를 기대하는 저학년 어린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화사한 색체가 눈길을 끌긴 하지만 그림이 내용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점을 비춰 볼 때 유아들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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