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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 일러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미메시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유려한 은유가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매끄러운 문장을 좋아한다. 기껏 써봐야 페북에 쓰는 잡문이 전부이지만 그런 글쓰기에 대한 로망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소설을 거의 읽지 않지만 (설령 읽어도 앞에 수식어가 붙는 소설을 주로 읽는다. 이를테면 추리, 판타지, 공상과학 등) 소시적 소설을 좀 읽을 때에도 썩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깊은 슬픔’이 주는 그 매끄러운 흡입력에 대한 기억때문이었는지 얼마 전 그녀가 사람들한테 엄청 욕을 먹을 때에도 난 왠지 이해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순전히 친한 친구(?)의 추천때문이었다. 이 책이 너무 좋아서 한국에 출판된 세가지 번역본을 다 읽어 보았다는 그 친구의 강추가 아니었으면 사실 이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쉽지 않았던 글읽기 내내 나의 목표는 도대체 이 책이 뭣이 그리 좋은가와 왜 제목이 최초의 인간일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이 책은 알베르 까뮈의 유작 아닌 유작이다. 까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쳤을 때 함께 발견된 검은색 작은 가방에서 미완성 육필 원고상태로 발견된 ‘최초의 인간'은 그래서 유족과 친구들의 반대를 넘어 출판되기까지는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30년이 지나서는 어떻게 출판되었는지의 과정도 흥미로운데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까뮈 본인(소설 속 이름은 쟈크)의 알제리에서의 유년기를 다룬 성장소설인 최초의 인간은 3인칭 시점이지만 쟈크 본인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심리묘사가 절제되어 있어 읽는 도중 문득 문득 1인칭 소설이 아니었던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앞서 얘기한대로 주로 읽었던 수식어가 붙는 소설들처럼 이야기의 전개가 흥미롭지도 않고 이야기 구조나 뜻밖의 반전으로 승부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간간히 황비홍의 화려한 발차기처럼 감탄을 자아내는 은유가 눈길을 붙잡기도 하지만 툭하면 한 페이지를 다 덮어버릴 듯 길어지는 문장들은 읽는 내내 대가들의 소설은 이리도 지루한가 하는 의문과 도대체 왜 이 책을 잡았을까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였으나, 어느 정도 까뮈의 글쓰기에 익숙해지면 이제 쟈크의 눈앞에 펼쳐있는 황량하고도 활기찬 알제의 거리와 주변 인물들의 심리와 상태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도록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계속해서 묘사하고 또 묘사하는 것이었다. 소설이 끝나고 나면(사실은 멈춘거지만) 까뮈의 생에 대해 할 이야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까뮈의 소설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쟈크의 상심과 생기와 고뇌(?)는 가슴 한켠에 턱하니 자리잡는 것이었다. 정신이 멍해지도록 푹푹 쪘던 한여름 내내 같이 했던 최초의 인간을 내려놓기가 아쉬워(?) 딸램을 불러 까뮈의 이 멋지고도 집요한 서사를 느껴보라 했더니 대뜸 날아오는 말이 “카프카에 비하면 양반이네”. 음 역시 소설은 수식어가 있는 것만 읽어야 하는건가....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뿌리도 신앙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하나하나씩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익명성으로 변한 나머지 자신들이 이땅위에서 왔다가 간 단 하나의 거룩한 흔적인, 지금 공동묘지 안에서 어둠에 덮혀가는 저 명문을 읽을 수도 없는 묘석들마저 없어져 버릴 위험이 있는 오늘, 모두 다 함께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자신들보다 먼저 이 땅위를 거쳐 갔고 이제는 종족과 운명의 동지임을 인정해야 마땅할 지금은 제거되고 없는 정복자들의 저 엄청난 무리들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