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기술 - 불안, 분노,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지키는 심리 기술
데런 브라운 지음, 김정희 옮김 / 너를위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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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 매일 늘어나는 어휘중 siempre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영어로 always, ‘늘’ 이라는 의미다. 반복적인 습관, 과학적으로는 관성과 같은 힘의 작용이다. 무척 당연하다는 이 단어가 새롭게 다가 온 것은 이 책의 첫 장에 나온 일화와 함께 나온 한 문장을 읽은 후부터다.
 
“얘는 사진만 찍으면 표정이 늘 이 모양이예요”
 
이 단어가 부정의 의미에서 사용되면 사람을 그 부정적 삶에 박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해방을 막고 서 있는 거대한 단어가 된다. 그 단어 하나가 얼마나 사람을 위축하고 쪼그라들게 만드는지, 이 부정의 측면이란 함정에 상대가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내가 매몰되어 있는 이야기, 눈의 맹점과 같은 부분을 들여다 봐야 한다. 우리는 깨어 있는 순간 이런 오류의 가해자이거나 희생양으로 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어쩌면 답없는 단어의 애너그램anagram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답을 다른 이에게, 특히 자기 자식에게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 Carl Gustav Jung은 ‘아이가 가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은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늘’이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관성과 같은 삶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2.
행복 추구에 대한 자기계발서와 사회적 압력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되려 불안을 조성한다. 옆에서는 불안의 치료에 대한 책이 넘친다. 병을 주고 약을 주는 형태다. 마치 건강프로그램의 바로 옆 채널에서 약을 파는 형국이다. 소위 불안의 포퓰리즘이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처음 받았을 때 ‘기술’이라는 언어에 거부감이 있었으나, 읽어 내려가며 기술은 ‘지혜”로 읽혔다.
 
행복에 대해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놀이를 포기하고 대신 봉사를 택했을 때 훗날 어떤 곳에 더 큰 만족감을 줄지에 대한 이야기다. 왜냐면 우리는 너무 흔하게 카르페디엠carpe diem이 오독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회적 구조가 이 현상을 더욱 부채질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니 즐기는 것이다. 저축을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세대에게 행복에 대해 세밀한 분석없이 ‘현재를 즐기는’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어쩌면 이 말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세대에게 기성 세대가 씌운 포장일 수도 있겠다 싶다.
 
3
행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산물이다. ‘행복할 권리’라는 개념은 지극히 현대적인 발상이고 우리가 느끼는 온갖 불안의 원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늘 행복할 수 있겠나. 행복은 감정이고 삶은 연속된 시간의 실재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행복 알약의 시대에산다> 편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얼마전부터 읽고 있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소마’라는 마약성 환각물질을 투여하는 세상의 공포를 꺼냈다. 헉슬리는 행복을 끈덕지게 추구하다 결국 인간의 본질, 운명의 마지막 보루인 유전자 구조를 바꾸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신성 약물 치료의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 물론 나도 그 대상이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기분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다. 나는 이 경향이 왜 멈추지 않는지 생각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내가 극도로 예민한 이유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현실을 견딜 수 없다’는 T.S.엘리엇의 말처럼, 나는 늘 내 영혼을 들여다 본다. 그렇다고 그렇지 않은 이를 폄하하지 않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짐을 떠안은 가장이 게임에 몰두하거나, 퇴근 후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를 존중한다. 이런 것 없이 산다는 건 너무나 단조롭고 레퍼토리가 없는 심심한 삶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이런 즐길거리는 우리가 자기 이야기에 깊이 관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메커니즘과 정반대라고 명쾌히 짚었다. 지금 우리의 위기는 자신의 깊은 욕구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모르고 여흥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너무 쉽게 섬세하고 예민하다고 나를 트리플, 아니 쿼드러플A형으로 박제한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쉽게 말한다. 나는 다만 당신과 다를 뿐이다. 내가 당신이 틀렸다고 말을 하지 않듯, 그저 당신도 나와 다를 뿐이라고 넘긴다. 마치 나를 특권에서 소외된 반항적 계층, 세상에 억압 당하고 있으며 그저 부정할 뿐,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다고 쉽게 말한다. 나는 삶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유한한 삶이고 보다 긍정적으로 검토할 뿐이다. 내 행복을 위해서, 니체가 이야기한 것처럼 내 자신이 되기(Become who I am )의 일환이다.
 
4
나도 한때는 분노와 화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추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며칠전 직원들끼리 서로 화를 내며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논리적인 건강한 싸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평소의 본성, 설득력, 지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예의 나 배려가 전혀 없는 흉포였다. 나는 일단 그 지긋한 공간을 멈추게 했다. 일단 멈췄다. 내가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권력이 한 언론을 탄압하고 있는 사실조차 몰랐다. 어제 알았다. 분노가 일고 화가 났다. 진정한 분노는 정의롭지 않고 비윤리적인 곳에서 터뜨려야 하는 화약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 적절한 지점이다. 하지만 그럴 능력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부당한 일을 목격하면 분노를 느끼며 상황을 바꾸려한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은 인지된 부당함을 바로 잡는데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 이 시점에 나는 이기주 기자에게 응원 댓글을 보냈다 )
 
중요한 건 우린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는 대로 일이 풀릴 거라는 기대보다 그냥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면 나름 잘 굴러 갈 거라는 거…
상처받고 분노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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