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림과 닫힘 -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
정진홍 지음 / 산처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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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홍 지음, 『열림과 닫힘: 인문학적 상상을 통한 종교문화 읽기』(산처럼, 2006)


종교학은 줄곧 아프다. 근대학문의 탈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지만 유독 종교학이 극단적인 증후를 내보이는 그런 학문적 고통이 있다. 왜 아플까.

대부분의 근대 학문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명확한 대상의 해명을 위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학문적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뚜렷하게 존재하는 ‘학문적 대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학문의 존재 자체가 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을 학문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근대 이전의 지식은 근대 학문의 자리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학문과 대상은 경계를 넘어 서로의 역사에 간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학문과 대상의 경계선이 얼마나 유동적인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을 때 그 학문은 아플 수밖에 없다.

종교학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학에서도 종교와 종교학의 경계선에 대한 물음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안이다. 20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종교의 비종교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종교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교학은 ‘종교학을 통해 새로운 종교성을 꿈꾸는 사람들’의 학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로 역으로 ‘종교학의 종교성’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학문과 종교의 차이에 대한 물음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마치 종교학이 종교와 학문이라는 대립적인 세계의 경계선에서 진동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곤 한다. 그래서 종교학이 다른 학문보다 더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정진홍 교수의 『열림과 닫힘』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책이 놓인 경계선은 망설임과 일탈과 호기심과 회상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학문과 종교의 틈새에 가라앉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상식적으로’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소리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독자의 귀는 상식을 넘어서는 굴절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종교에 대해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할수록 종교가 전혀 다른 ‘비상식적인’ 모습을 띠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얼핏 목차만을 볼 때 이 책은 15개의 주제어에 대한 분리된 해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각각의 주제어를 통해 매번 종교의 이중적인 성격을 역설적으로 포착해 낸다. 저자의 이야기에서 길을 잃는 독자라면 이러한 역설의 구조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험」, 「물음과 해답」, 「문화」, 「역사」, 「언어」, 「해석」의 여섯 개 장은 종교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이야기하는 장들이기에 모두 비슷한 논리 구조를 취하고 있다.

「경험」에 관한 장을 살펴보자. 저자는 종교가 경험에서 비롯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학문적이든 종교적이든 종교에 관한 담론은 신성, 초월, 신비, 절대의 언어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학문은 ‘초월의 실증 불가능성’을 내세우며 종교의 말을 불신한다. 종교는 ‘초월의 이해 불가능성’을 내세우며 학문의 언어를 배척한다. 따라서 저자는 양쪽 진영을 모두 설복시킬 만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일상적인 경험이 어떤 계기에서 종교적인 경험으로 ‘변형’되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인간이 자기 경험의 절대성을 주장하여 그 경험을 신성, 초월, 신비라는 극적인 어휘로 수식하는 순간에 종교 경험이 탄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일상 경험과 종교 경험은 이질적인 별개가 아니다. 얼마만큼 경험을 절대화하느냐에 따라, 일상 경험이 종교 경험으로 변형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에 대한 추구는 아름답지만, 전제된 절대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중요한 지적이라 생각된다.

저자의 표현을 약간 바꾸어 보면, 일상 경험과 종교 경험의 차이는 ‘경험 내용의 차이’보다는 ‘경험 형식의 차이’에서 찾아져야 한다. 절대는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경험의 형식’이다. 따라서 종교의 형식은 결국 문화적 산물이기에 저자는 ‘종교문화’의 틀 내에서 종교를 살펴야 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물음과 해답」의 장도 비슷한 서술 구조를 취한다. 인간은 특정한 계기에서 물음을 묻고 해답을 추구한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종교는 물음을 물으면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해답을 살면서 그 물음을 완성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스스로의 물음과 해답을 ‘완벽한 물음’이자 ‘완벽한 해답’으로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는 ‘물음 이후의 물음’과 ‘해답 이후의 해답’을 추구하기에 아름답지만, 자기 해답의 궁극성을 전제하는 순간 충분히 폭력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장에서 저자는 믿음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성, 감성, 상상, 의지라는 네 가지 마음결과 믿음이라는 마음결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더불어 이야기한다. 「문화」의 장은 문화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비문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의 역설을 추적한다. 「역사」의 장은 종교가 비역사성을 주장하는 역사적 현상이기에 기억의 상실이 신의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언어」의 장은 언어의 역사 속에서 종교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을 발언문화와 기록문화의 대비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종교언어는 본래 시적 언어에 가까운 것이지만 경전이라는 ‘종교 형식’을 통해 시적 언어가 절대화될 때 종교는 얼마든지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석」의 장에서 저자는 해석이 사실을 상징으로 변형시키는 새로운 ‘상징 만들기’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종교가 지닌 ‘해석과 반해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몸」, 「몸짓」, 「힘」, 「타자」, 「비교」, 「죽음」, 「사회」에 관한 일곱 개의 장은 종교문화를 해독하는 비평적인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몸과 몸짓을 통해 전승되고 창조되는 ‘비언어적 종교성’에 주목할 것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힘의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 정치, 과학기술 안에 잠재된 ‘종교적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인간을 구원하는 절대적인 힘을 추구하기 때문에 역으로 종교문화가 폭력성을 내장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구조’를 풀어낸다.

맺음말인 「종교인과 종교적인 인간」은 책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장이면서 동시에 책 전체를 부정하는 독특한 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앞의 각 장에서 설명했던 “종교라는 개념의 범주 안에는 이미 ‘종교’가 없”다고 진술한다. “붕어빵 속에 붕어 넣기”라는 머리말의 농담과도 연결되는 주장이다. 개별 종교들을 하나의 범주 안에 묶어 서술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 개념(개념적 실재)이 종교 경험(경험적 실재)을 대체하고 폐기함으로써 현대의 이성이라 할 상상의 호흡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종교 안에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저자가 종교라는 붕어빵 안에 ‘진정한 종교’를 넣는 꿈을 상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붕어는 지느러미를 팔락대며 멀리 하천에서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을 강조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나지 않는 학문적 아픔과 치유가 있었다. 아픔은 종교학이 종교와 학문의 가느다란 경계선에 대한 상상력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치유는 “나는 너를 상상하고 말테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 때문에 가능했다.

글쓴이: 이 창 익(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출처: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006년 8월 1일 제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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