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 갈색 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푸른 눈 갈색 눈>은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라는 부제로 오래전 미국의 한 교실에서 벌어진 차별수업에 관한 책이다. 초등학교 3학년을 담당하고 있는 엘리어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이후 반 아이들과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이 인종차별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엘리어트는 아이들에게 '흑인'에 대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지 질문한다. 아이들은 각기 다양한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이 '더럽다, 무섭다' 등 부정적인 단어들 뿐이었다. 엘리어트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편견과 차별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차별 수업'을 진행하기로 결심한다. 차별수업은 푸른 눈과 갈색 눈으로 그룹을 나누고, 한 그룹을 일방적으로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먼저 엘리어트는 아이들에게 '푸른 눈'은 '갈색 눈' 에 비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며, '푸른 눈'은 '갈색 눈'에 비해 더 많은 이익(5분 더 쉬는 시간을 갖는다, 먼저 식사를 할 수 있다, 식사를 원하는 만큼 더 할 수 있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엘리어트는 의도적으로 갈색 눈 아이에게 사소한 트집을 잡고 구박한다. 엘리어트에 의해 우월한 그룹이 된 푸른 눈 그룹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 활발해지고, 자신들보다 (엘리어트에 의하면)열등한 갈색 눈 그룹 아이들을 차별적으로 대한다. 반대로 갈색 눈 아이들은 갈수록 우울해지고, 자신을 실제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갈색 눈!'이라고 부르는 것을 모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는 아이들은 엘리어트의 말 한마디에 서로를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차별적인 행동을 한다. 그리고 다음날 두 그룹은 역할을 바꾼다. 먼저 차별을 경험한 그룹은 우월한 그룹이 되었음에도 다른 그룹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덜 적극적이었다. 한번 차별을 받아본 아이들이 차별의 고통을 느끼고 다른 친구들에게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고작 이틀간의 차별수업이 이들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어? 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14년만에 다시 동창회에서 모인 (차별수업을 한)아이들의 대화를 보다보면  '차별수업'이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엘리어트가 바란 것은 아이들이 고통스럽게 얻은 지식, 즉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 또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임의적인 차이에 근거한 차별이란 터무니 없으며 비합리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약 아이들이 이 문제를 열심히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편견을 외부에서 강요받을 수 있다는 점을 오래 기억하는 것이었다. 엘리어트는 단지 누군가가 무엇을 말했다고 해서, 단지 사회가 어떤 사실을 이미 확립된 것인 양 취급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사실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아이들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알기를 바랐다. 엘리어트는 아이들이 생각하고 사리를 따져보고, 질문하기를 원했다. 아이들이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출발점을 자신이 아이들에게 준 것이었기를 바랐다.


  엘리어트는 차별수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얼마나 차별에서 자유로운가'에 대해 고민하고, 차별에 대해 저항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백인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에 흑인에게 세를 줄 수 있다고 말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나 또한 한때 '권리'와 관련된 교육을 했을때, 이런 고민을 꽤 했었다. 나는 얼마나 권리를 존중하는지, 내 행동의 중심에,  내 생각의 중심에 '권리'가 항시 있는지. 그리고 나의 과거에서 '권리'가 있었는지.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직면할 자신이 없어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을 금세 포기했었다. 대충 '앞으로 내 행동과 생각에 권리, 인권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지'라며. 


  이 책을 읽게 된 시점에서 나는 다시 고민하게 된다. 비록 지금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하지 않을 뿐, 다시 할 나의 일이니깐 말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얼마나 차별에서 자유로운가?'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나는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과거와 현재를 가지고 있고, 차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미래를 가지고 싶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더 말이 없고, 나 밖에 모르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도 아이였다. 그런 탓에 견고한 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아이들을 조금 차별적으로 대한 것 같다? 대했다? 내가 정한 그 기준은 결코 그 사람이 우월한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 비하면 차별에 대해 조금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다른이의 차별적인 태도에 저항하지 않는 방관자이다. 그런 이유로 과거의 나와는 다르지만 현재의 나 또한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여전히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미래의 나는 차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기를 바란다(지금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얼마전에 읽던 '나는 말랄라'라는 책이 떠오른다. 나는 말랄라처럼 그런 엄청난 용기를 스스로에게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행동과 생각에 의해 다른 사람이 차별을 느끼지 않기를. 내 주변사람-일적으로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도-이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차별에서 자유로워 지기를. 거창한가? 흠).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여러 오인이 있겠지만, 스펜서 교수는 가장 큰 이유가 부모의 태도가 다르기 떄문일 거라고 추정했다. 백인 부모는 자녀에게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피부색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없기 떄문이다. 반면 흑인 부모는 피부색 때문에 사회의 차별과 편견으로 자녀가 상처받을 가능성을 의식하기에 아이들과  인종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 중략 ... 백인부모에게 인종차별은 지나간 과거이자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차별을 안하지 않나?' 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차별을 당해보지 않았기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백인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와 인종문제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제인 엘리어트가 한 일이 조나스 소크가 1950년대에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들의 몸은 소아마비로 불구가 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로 아이들의 마음이 불구가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 교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남아있는 유일한 질문은 우리가, 백신처럼 약간의 균을 포함하고 있는 그 처방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고민해본다. 만약 내가 차별에 대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 나는 보통 옮긴이의 말을 대충 훑어 버리고 넘기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은 꽤 흥미로워 정독하였다. 이 책의 옮긴이는 전문 번역가가 아닌 아동권리기관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 근무중인 분이라, 엘리언트의 차별수업을 한국에서 어떻게 적용시켰는지 살짝 엿볼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차별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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