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알싸한 프러포즈 일인시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사이시옷 지음 / 헤르츠나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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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분노하라> 그리고 <일인시위>는 나에게 한 권의 책처럼 읽혔다. 나는 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기를 원했고, 이 세 권의 책은 하나의 목소리로 정답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를 테면 좋은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불편을 얼마만큼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저자 마이클 샌델이 던지는 무수한 질문에 대답하려 노력하는 대신, 나는 이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하버드대 교수가 어디쯤에서 자신의 ‘정답’을 이야기해줄 것인지 안달이 났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독일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는 정체성에 있어서 개인주의는 틀린 것이라고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해 타국에 사과해야 하는가’, ‘일본 역시 한국과 중국에 사과해야 하는가’, ‘미국의 백인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흑인 차별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가’. 마이클 샌델의 답은 ‘그렇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가족은 물론 사회의 구성원이고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노하라>는 그동안 내가 ‘정치적’이라는 말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인식을 어느 정도 걷어내 주었다. 덤으로 논쟁적인 사람에 대한 색안경도 벗어낼 수 있었다. <분노하라>의 저자는 93세의 노인 스테판 에셀로, 레지스탕스 운동의 일원이었던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논쟁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세계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음을 긍정하고 희망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일인시위>. 이 책의 서두에서 홍세화는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광신자와 사익을 추구하는 자와 극단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익을 위해 거리에서 일인시위를 벌이는 사람은? 일인시위가 그만큼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모두 스테판 에셀처럼 자신의 작은 목소리로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 있기를 희망하고, 마이클 샌델이 말한 정체성과 동일하게도 자신의 문제가 곧 사회의 문제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개인의 이익과 공동의 이익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 개인적인 사연은 있었다. 20대의 젊은 아들이 자살했고, 1년간 준비했던 임용고시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사항은 그들은 물론이고 삼성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삼성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임용고시 준비생들, 더 크게는 노동자라는 거창한 명칭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 없는 보통의 근로자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세 권의 책을 읽고 ‘좋은 세상을 누리려고만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뒤통수를 쳤다. 평소에 프랑스를 동경해 왔는데, 환경미화원이 시위를 하면 한국사람은 길거리의 쓰레기를 보며 시위자들을 탓하고, 프랑스사람은 그 쓰레기를 주워다 정부기관 앞에다 쌓아둔다는 글을 읽었을 때도 ‘역시 프랑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4대강 사업에 분통이 터지고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극도의 불안을 느꼈던 것을 떠올려보면 분명 ‘누리려고만’ 한 게 맞다. 프랑스 역시 오랜 논쟁과 시도 끝에 지금에 이른 것인데, 내가 좋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것이다.

부당함에 눈감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선 <일인시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일인시위는 최후의 수단이었고, 그전에 편지쓰기, SNS 가동, 언론플레이 등의 활동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폴렛 데일의 <대화의 기술>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당당한 요구하기의 참고서가 될 수 있겠다.

시위 현장에 나서겠다거나 나서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말하고 수용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했는데 이를 위해 불편을 감수할 용의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을 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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