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파랑
정이담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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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 책 소개를 찾아볼 때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이 이야기가 누구의 것인지다. 어떤 이야기인지, 글체가 내 취향인지, 느낌이 어떤지도 중요하지만 역시 내가 이 인물에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불온한 파랑>을 끌고 가는 인물은 은하와 해수로, 작중에서 독자에게 눈을 빌려주는 건 대개 은하다. 은하는 해양사고 구조 작업 중 구조사였던 아버지를 잃고 물로부터 도망쳐 항공우주공학과에 진학한다. 해수는 그 해양사고로 언니를 잃었고, 둘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재회한다.

‘상실로 인한 고통을 서로에 기대어 치유한다’는 책 소개가 낯익게 다가온다. 다만 아픈 사람들끼리 둔다고 저절로 낫지는 않는다. 게다가 바깥 세상은 ‘죽음이 특권’이라며 그 상처를 인정조차 않는다. 해수는 광장에 다녀온 밤마다 몽유병을 앓고, 아이들은 매 순간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서로를 상처입힌다. 하지만 같은 아픔과 같은 증오와 같은 그리움을 가진 은하와 해수는 둘뿐인 기숙사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해내고 일어선다. 잠결에 바다로 뛰쳐나가지 않도록 서로의 손목을 묶어두고, 날 선 말로라도 속마음을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준다. 읽으면서 정말 강한 아이들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한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얼굴도 모르고 거대한 시련 앞에서 움츠러든 모습만 보고 있는데. 만약 은하와 해수가 오늘 점심 식단이 가장 큰 관심사이고 다음 주에 있을 중간고사 정도가 고민인 보통의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모든 이야기는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간다지만 이 ‘사건’을 벗겨낸 두 아이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내내 그게 궁금했다.

장면 전환이 꽤 빠르다. 바다가 놀이터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은하의 어린 시절, 둘보다 많은 사람을 앗아간 사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더 아프게 했던 광장과 대학 시절, 해수가 하이드로세슘을 발견한 연구소, 잠수정이 폭발한 진수식, 새로운 은하의 낙원 프로젝트와 시험 보고서 위조 사건을 거쳐 은하의 출항식까지가 책의 앞쪽 절반이다. 이 책의 중요한 전환점은 모두 사고에 기인하고, 늘 정치적 입장이 엮여 있다. 은하의 아버지와 해수의 언니를 잃은 해양 사고는 끝까지 희생자와 유족들을 괴롭힌다. 잠수정 제작 과정에서 부품 납품 비리가 발생하고 이를 고발한 해수는 좌천당한다. 부품 문제로 안전하지 않으니 조류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던 은하의 주장은 묵살되고 잠수정은 첫 출항에서 폭발한다. 낙원 프로젝트에서 은하는 우주선 엔진의 안전성 평가 비리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우주비행사 지위를 건다.

<불온한 파랑>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무심코 ‘파랑’이 저항하는 이야기구나, 그 저항은 순탄치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불온하다’는 ‘판단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고 알맞지 않다’는 뜻이다.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말은 통치 권력과 체제에 복종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치는 세계에서 온 단어인 것이다.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아이들이 안쓰러웠고 조마조마했다. 애착이 붙기 시작한 건 은하가 우주-낙원 지구로 건너간 이후다. 두 사람의 관계를 한 사람의 시점에서 서술하다보면 대개 다른 한 사람은 가장 아득하고 환상에 가깝게 그려지곤 한다. 통신이 단절된 시점에서 너는 영원히 내 기억 속의 모습으로만 존재하고 나 혼자 어떻게 생각해도 수긍하거나 반박하지 못한다. 이제 너는 온전한 네가 아니라 내 안의 너로서만 존재한다.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의 아스라한 느낌이 떠오르기도 한다. 은하와 해수가 함께한 시간은 스무 살 무렵부터 몇 년이 채 안 될 거다. 은하가 우주로 떠나 기지에서 보낸 시간은 오십 년이 넘는다. 하지만 은하의 그리움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일생에 걸쳐 이렇게 많은 걸 공유한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조차도 살아가는 동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찾곤 하는데.

은하는 결국 해수에게 돌아간다. ‘파랑’을 불온하다 칭했던 사람들은 이미 제 욕심에 넘어가 더는 지구를 더럽히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욕심이 홀로그램으로서 조금 더 파랗냐 조금 덜 파랗냐로 나타난 건 소소한 웃음거리였다. 해수는 고래가 되었다. 물을 두려워하던 시절 고래자리를 보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어린 아이는 자라서 스스로 고래가 되어 지구에 남기를 택한다. 바다에서 시작해 우주에 이르기까지 온통 파란색투성이인 책에서 ‘파랑’이 뜻하는 게 무얼까 고민했는데. 인간의 욕심과 자본과 기계의 논리에 반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파랑’은 바다이고 우주이고 거기에 삶을 바친 해수이고 은하이며 우리의 푸른 별(실제로 별은 아니지만) 지구와 지구에서 사라져 간 모든 생명체, 어쩌면 끝내 무해한 존재로 바뀌어간 홀로그램까지도.

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연상되는 곡이 있다. Jim Brickman의 Tsunami라는 피아노 곡인데, 쓰나미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잔잔하다. 휴양지의 투명하고 반짝이는 바다도, 폭풍우 몰아치는 비바람도 아닌 희멀건한 물빛이 떠오르는 음악이다. 이 이야기도 책의 배경을 소개하는 전반부에 약간의 굴곡이 있을 뿐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후반부는 고요하다.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서 그저 서로를 그린다. 내심 두 아이가 조금 더 서로의 곁에서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러기엔 둘을 둘러싼 환경이 참 어려웠다. 유일하게 마냥 평온했던 시기가 은하가 일을 그만두고 해수가 좌천당한 잠깐 동안인게 가장 안타까웠다. 내게는 ‘상실을 겪은 두 아이가 서로를 통해 치유하는 이야기’보다는 ‘너와 함께 상실의 근원을 끝없이 파고드는 이야기’에 가까웠던 것 같다. 작가의 전작 <괴물 장미>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 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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