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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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입문하려는 친구들이 나에게 책 추천을 부탁하면 꺼내드는 책이 『홀』이다. 늪에 빠진 듯했던 당시의 기분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책을 단 한 권밖에 읽지 않았으면서, 그 순간부터 나는 책장에서 편혜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발견하면 자연스레 멈춰 서게 되는 사람이 되었다. 핀 서포터즈 활동의 마지막 도서로 『죽은 자로 하여금』을 고른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다. 나머지 한 가지는 이 책이 핀 시리즈의 제1권이라는 데에 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책을 받기 전에도, 받은 후에도, 그리고 글을 작성하는 지금도 ‘마지막은 곧 새로운 시작이 아니겠는가’ 여러 번 되뇌었다.

무주와 이석은 이인시의 종합병원에서 일한다. 이석에게는 아픈 아이가 있다. 아이에게 가망이 없다는 원장의 이야기로 이석과 원장은 사이가 좋지 않다. 한편 무주는 권과 함께 위원회에 소속되면서 사무장으로부터 “혁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무주는 이를 테스트로 받아들이고 회계 감사를 진행한다. 장부를 살피던 중 그는 컴퓨터, 티슈는 물론이고 모든 약품의 구매 단가가 높이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착복을 저지른 사람이 다름 아니라 자신을 평소 잘 챙겨 주었던 이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무주는 갈등한다. 폭로 또는 은닉, 어느 쪽을 택하는 대신 그는 병원 게시판에 비밀 글로 이석의 비리를 적어 올린다. 며칠 뒤 무주는 글을 삭제하러 홈페이지에 접속하지만 글은 이미 삭제된 상태. 발각되어 봤자 이석 정도의 유능한 직원은 경고나 감봉에 그칠 줄 알았던 무주의 예상과 달리, 이석은 사직 처분을 당한다. 그리고 누군가 환자의 헤파린 용액 주머니에 인슐린을 주입해 약물 쇼크가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편혜영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에는 소설이 주는 분위기와 공간이 조성하는 기류를 빼놓을 수가 없다. 『홀』을 읽을 때 어딘가 축축한 공간에 갇혀 있는 기분에 괜스레 피부를 만져댔다면, 이번에는 목구멍이 바싹 타 들어가는 기분에 몇 번이고 침을 삼켰다. 건조하고 바삭바삭했다. 『죽은 자로 하여금』은 말 그대로 무서운 소설이다. 무주의 아내가 무서워하는 이인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소설. 이인시는 “사방 어디에서고 생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임시 시설에 기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공간이다. 이어 이야기의 주 무대를 병원으로 설정함으로써 냉랭한 공기를 형성하고, 분위기로 우선 압도한다. 이 소설 속 인물은 모두 손에 돌을 쥔 채 던질 수 있는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선뜩한 발상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기시감이 들어 불편했다.



부정적인 관행은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다. 작은 조직 하나에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규율은 있는 법이다. 모두가 그 규율을 지키면 좋으련만, 누구나 알고 있으나 엄두를 내지 않았던 방식을 누군가 한 명이 총대를 메고 시작하면서부터 “관행”은 만들어진다.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이런 부분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내부 고발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아가며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큰 일이 아닌 것 같고, 혹여 그 관행을 거슬렀다가 나만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보호적 본능이 앞서고. 제때 바로잡지 않은 관행은 점점 번지고 오히려 수를 늘려갔다. 더러운 부분이 없었던 시절이 있긴 할까.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겠지만, 설령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생각만큼은 모두 동의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본모습인 양 깊이 뿌리 박아 버리지 않았는가. 몸 담은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은 더 깊은 늪에서 헤엄치는 일뿐이다.

무주는 처음에 은밀한 지시를 받고 갈등하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이석의 비리를 고한 당시에는 정의로운 내부 고발자가 된다. 이석의 아이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뒤에는 사소한 잘못 하나 감싸 주지 못했던 냉혈한으로,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당한다. 왜 그랬는지 모를 “조심해요” 한마디로는 언제든지 폭로를 통해 또 다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잠정적 가해자 취급 당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제당한다. 이내 “격무에 시달리다가 관두”라는 목적으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조직 내부 비리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독서를 끝낸 뒤 이번 도서 선택이 영민했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뿌듯함을 느꼈다. 처음과 마지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에도 완연한 피해자나 완연한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수십 번 “그냥 말해” 외쳤다. 결국 절실히 요구되는 바는 대화와 청자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주는 처음 따가운 눈초리가 자신을 향할 때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료들은 들을 생각을 않는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관해서는 듣고 싶어 하는 아내가 있지만, 도리어 무주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만약 동료들이 무주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면 그의 내부 고발이 헛된 일이 되지 않고, 무주가 아내에게 이야기하려 했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을까. 이따금 나도 사람들도, 전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송은 “양수 씨.” 부르며 이유를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으나, “제 이름은 무주입니다.” 대답하고 당사자가 아닌 이석에게 이유를 물었던 무주처럼. 무주의 마지막 결심과 같은 현상이 모두에게 빈번해지기를 빌었다. 『죽은 자로 하여금』은 과연 핀 시리즈의 첫 번째 선택답게 마음 한편을 정확히 후벼파는 소설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서포터즈 활동의 마지막을 이 책과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다.

※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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