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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
김동진 외 지음, 김동진 기획 / 학이시습 / 2020년 10월
평점 :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 났을 때 나는 그저 분노의 상태였다. 자세히 알게 된 상황이 화가 났고, 상황을 만든 상황이 화가 났고, 상황이 계속되는 상황이 또 화가 났었다. 가해자들에게 화가 났고, 피해자들이 감당했어야 하는, 그리고 감당하고 있는 고통에 화가 났고, 그저 화만 내는 내가 너무나 무력해서 또 화가 났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는 건지 생각할 힘도 없이 그저 분노해있었다.
페미니스트는 결혼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우스개소리가 이런 의미일까, 남자 아이의 엄마이면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사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하는 요즘이었다. N번방과 같은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나의 아이가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 화를 낼 수도, 수긍을 할 수도, 그렇다고 절대 우리 아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언할 수도 없어 고통스러웠다. 어느 여자 아이 보호자가 또래 남자아이들을 보며 잠재적 가해자라고 표현하는 걸 들었을 때,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여자아이 양육자들에게 준 ‘공포’와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아직 아무런 일을 당하지도 않은 여자아이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아직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남자아이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설정하는 건 너무 하지 않나요? 라는 질문이 내내 마음에 소용돌이쳤더랬다. 그냥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마음 꾹꾹 누르며 그렇게 살까 싶은 요즘이었다.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는 그런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혼자 애쓰지 않아도 이렇게 고민하는 우리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처음 N번방을 발견하고 추적한 추적단 불꽃으로 시작해서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청년, 영유아-초등 교사, 중-고등 교사, 교대 졸업생, 대학 안팎의 교육 주체, 남성과 기혼 여성, 그리고 문화예술인까지 각자들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서술된 글들은 마치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고민을 형상화한 9각형 도형을 든든하게 버티는 8개의 꼭지점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마지막 9번째 꼭지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 것 같았다.
글을 읽으면서 나를 포함한 9개의 주체가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듯했고, 이 과정에서 마치 나는 기혼여성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학부모가 되고, 나의 아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고민하는 아이가 되고, 나의 남편은 남함페가 고민하는 남성 대상이 되는 관점의 공유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종종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를 하면서도 나는 이런 활동이 가능한 일부의 기혼 유자녀 페미니스트라는 자책감이 들곤 했다. 페미니즘이 너무나 필요한, 하지만 삶을 사는 데 많은 힘을 들여야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쓸 여력이 없는 기혼 유자녀 여성들에게 어떻게 페미니즘이 가닿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맥이 빠지곤 했다. 근데 책을 읽어가면서 그녀들이 교사들이 고민하는 ‘학부모’들로써 페미니즘을 만날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책 전반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교육’이란 무엇이어야 하고, 페미니즘 교육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과 문화예술인들의 글에서 논의되는 우리 사회와 아이들의 놀이와 소비 방식의 변화와 유치원 선생님의 글에서 언급되는 공감 교육의 필요, ‘성인지감수성’, ‘동의’, ‘강간 문화’, ‘반려인’ 등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 등에 무척 공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내가 여성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남자 아이의 엄마로써 살아가면서도, 그리고 우리 아이가 살아가면서 함께 계속 고민하고 말하고 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하는 든든함이었다. 최고 난이도의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중에 난코스마다 한 명씩 같이 달려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는 ‘서로가 서로를 긍정적으로 바꿔주는 젠더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고, 타인을 단죄하는 분노가 아닌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분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눈물 흘리지 않고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세상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해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교육을 고민하고 페미니즘적 전환은 곧 ‘삶의 전환’이라며 교육 전반의 전환을 꿈꾸는 교육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교육 현장에서, 양육 전반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페미니즘이 있고, 그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우리들이 있다면 N번방 이후의 교육, 아직은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