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 삶의 르뽀 001
배성훈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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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라고는 제대로 접하지도 못했고 그저 신문지상으로만 봤던 보통 아줌마인 나. 그런 내가 처음 책 제목을 접한 순간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물류를 멈추는데 세상이 왜 바뀌어? 과장도 심하네.'
그리고 책을 읽었는데, 아뿔싸. 내 짧은 생각이여! 내가 지금 쓰고 입고 먹고 자고 싸고 마시고 타고 하는 모든 것이 다 물류 없으면 어디 꿈이나 꿀 수 있는 것들이랴?
아니, 하다못해 책과 인쇄물에 기대어 사는 내 직업상, 택배 배송이 하루만 멈춰도 난리브루스를 춰야 하는데,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했던 것이 내심 부끄럽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단순히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만을 다룬 책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화물차를 모는 운송 노동자들은 그 무서운 고속도로(나는 정말 고속도로가 무서워서 경인고속도로 아니면 아직 차를 올린 적이 없다)에서 먹고자고일하는 사람들이다.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졸리면 또 졸린대로(!) 낮밤 구분 없이 그냥 운전대를 잡고 앞으로앞으로 액셀페달만 밟아대는 사람들이다. 나처럼 편하게 사무실에 앉아 더울 땐 선풍기, 에어컨 다 틀고, 추울 땐 보일러 빵빵 틀면서 입과 손만 놀려가며 일하는 사람과는 노동강도와 성격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 이들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보면 한숨 나온다고 한다. 물론 이 책에는 이 노동자들의 자세한 노동조건이 수치나 객관적 자료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서른 넷 꽃다운 나이의 젊은 가장의 죽음은 우리 앞에 거부도 부인도 변명도 하지 못할, 그 어떤 '수치'와 '객관성'을 뛰어넘는 증거로 들이닥쳤다. 이쯤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나와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이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일해도 생계가 불가능해서 목숨을 끊었다고 치자. 과연 나는 어떤 심정이 될까? 너무 절망스러워서 당장 짐을 싸들고 어디론가 도망치든지, 아니면 '우리'를 그렇게 사지로 내몬 '원흉'을 찾아 내 분노를 폭발시킬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 건가? 옆에서 남이 고꾸라지든 말든 그냥 나만 안 죽으면 그만이고 내 가족, 내 새끼만 목숨 보존하면 되는 거니까 조용히 입다물고 고개 숙이고 눈감고 있으면 되는 세상이니까, 그런 분노의 폭발은 당연하지 않은 건가?

나는 항상 궁금했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들이닥치는 돈의 논리와 착취의 논리 때문에 벌어진 일들인데 왜 항상 '그들만의 파업'이 되고 '저들만의 투쟁'이 될까?
이 책을 읽는데, 저자가 몇 번에 걸쳐 강조하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는 그냥 민노당이니 민노총이니 하는 단체의 활동가이자 간부였는데 1098명의 화물노동자들과 8일간 동고동락하며 포항의 한 조그만 축구장(그들은 멋진 이름, '해방광장'이라 부른단다)에서 농성하고 울고 웃고 함께 싸우다 보니 얼마나 민중의 힘, 노동자의 힘, 그냥 힘없이 보이던 보통 사람(이 멋진 말에 더러운 분칠을 해놓은 노태우는 잊어달라^^)들의 절절한 마음과 열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느꼈다는 얘기다. 2003년에 5월 초순에 일어난 화물연대의 파업과 그들 노동자들의 엄청난 행동, 그 뒤에 따른 크고 작은 파급효과들은 아마 바로 정확히 5년 뒤인 2008년 5월 초, 촛불을 든 어린 학생들과 아줌마들의 함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왜냐고? 2003년에는 큰 트럭과 트레일러를 모는 손이었고, 2008년에는 연필과 국자를 든 손이었다는 차이만 있었을 뿐 우리는 다 똑같은 민중이요 서민이요 국민이기 때문이다.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고, 주저앉아 조용히 한숨만 쉬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예속된 노예요 유민에 불과하다.
화가 나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똘똘 뭉쳐서 이야기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책에는 2003년까지(아니 지금도)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극심한 노동과 형편없는 처우에 시달리는 화물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았지만, 어쨌든 내 부모, 내 남편과 아내, 내 형제, 아니 바로 나의 얘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배성훈이라는 한 노동운동가가 2003년 화물연대 파업투쟁의 하루하루를 참여자이자 주체로서 보고 들은 것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내용을 다듬어 만들었다. 내용은 너무나 열정적이고 톡톡 튀는 문체와 파격적인 형식으로 일관하는데 겉을 감싼 디자인과 서체, 편집 등은 80년대 분위기가 나서 어색하다. 이 텍스트의 시작이 인터넷이라는 첨단 미디어였던 만큼, 책은 책대로 여러가지 파격의 시도를 해볼만 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러려면 시간, 비용, 노력이 모두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이 책이 더욱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수요가 많아져서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파업투쟁 일지를 읽으면서 눈물과 폭소를 번갈아 터뜨린 책은 처음이다. 지금의 독자들은 이런 책에 두팔 벌려 환영한다. 저자의 쌍방향식 글쓰기와 생생하고 자유로운 르포가 무엇보다도 '신세대'적이니까.
저자는 아직도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고 5년이 지난 2008년 봄의 현장에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화물연대 파업투쟁 그 5년 후'를 덧붙이게 했으면. 지금은 투쟁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촛불과 국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파고들었는지, 화물연대의 활동이 이명박 정권과 맞서서 어떤 화학작용을 거치며 진화했는지 궁금하다.
저자의 다음 책 혹은 이 책의 환골탈태를 기꺼운 마음으로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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