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추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1
듀나 지음 / 알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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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지만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한국 SF계의 살아있는 역사, 듀나 작가의 신작 <평형추>를 읽었다. 듀나는 20여 년 전 PC 통신 게시판에서 SF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작가가 '한국인'이 등장하는 'SF'를 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 후 꾸준하게 큰 기복 없이 많은 SF 작품을 써 온 그는, 한국 SF의 중흥기(?)를 맞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작년 5월 장편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를 발표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장편 소설을 낸 것이다. 장편이지만 읽기에 부담스러운 양은 아니다. 책은 아담한 판형에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지 않다. 내용도 무거운 주제를 깊이 탐구하기보다는, 경쾌한 터치로 여운을 남기는 편이다. 동시에 소설이 다루는 공간적, 심리적 스케일은 결코 작지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며 히로에 레이의 만화 <블랙 라군>이 떠올랐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적도에 설치되는 게 이상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일단 작중의 배경이 되는 '파투산'은 열대지방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아는 게 적어서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동남아권의 문화적 토대 위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합법과 위법이, 도덕과 타락이 골고루 섞인 멜팅팟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출판사의 설명을 보니 인도차이나, 수마트라 문화권의 영향을 표현했다고 한다.) <블랙 라군> 속 가상도시 '로아나프라'가 바로 그렇다. 다른 게 있다면, <평형추> 속 로아나프라에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듀나 작가답게, 이번 소설에도 다양한 SF 요소가 들어있다. 사실 사이버펑크 SF에서는 이미 식상할 수 있는 요소다. 지상과 우주를 잇는 궤도 엘리베이터(소설의 제목 <평형추>는 원심력으로 줄을 잡아당겨 그 장력으로 엘리베이터의 구조를 유지시키는 장치다), 국가 권력을 위협하는 거대 기업 LT의 경제적, 사법적, 정치적 지배, 뇌 속의 임플란트 식 컴퓨터(웜), AI와 융합해 인간을 초월해 가는 인간상(영화 <루시>에서처럼) 등. 그러나 그 요소들이 맛깔나게 버무려져 향신료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볶음밥이 되었다. 1인칭 화자의 독백에서는 시니컬하고 관조적인, 쌉싸름한 하드보일드 첩보물의 맛이 감돈다. SF와 첩보를 결합한 장르에 흥미를 느낀다면 배명훈 작가의 소설 <은닉>도 추천한다. <평형추>와 <은닉> 둘 다 SF 작가가 쓴 첩보물인데, 전자가 SF에 가깝다면 후자는 첩보물에 좀 더 가깝다.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는 낯선 세계의 긴박한 상황에 던져져, 1인칭 화자의 독백 속에서 이 세계의 구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마치 게임처럼 느껴지고 몰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그 과정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고, 책 속의 세계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종종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 등장해 독해 속도를 더 깎아먹기도 했다. 결국 소설의 전반보다는 세계에 익숙해진 중후반이 훨씬 재밌게 느껴졌다. 소설 속 배경인 '파투산'은 정말 매력적인 곳이다. 전체가 계단식 구조에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거대 계획도시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은 '내장'이라 불리며 쓰레기 처리장 등 혐오시설이 위치한다. AI가 각 장소마다 테마가 되는 곡조를 정해놓고 변주해 들려준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월레스 사 로고송이 생각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간 노동력이 로봇으로 대체된다. 소소할 수 있지만 이런 '새로운 세계(시대)에 대한 설정'이 가장 마음껏 즐긴 포인트였다.



소설은 빠르게 읽히고, 재미있다.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전개가 영화적이다. SF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반대로 말하면 SF 영화에서 많이 본 것만 같은 이미지나 전개가 나온다고도 할 수 있겠다. 중요한 인물을 여성이나 동성애자로 설정하고, 그 부분을 가능한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노력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특히 김재인은 털털한 성격에 AI와 친밀도가 높으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진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좀 더 비중이 크거나, 좀 더 일찍 등장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김재인의 과거나 그의 속내가 많이 궁금했다.



결국 '인간 둘과 궤도 엘리베이터의 삼각관계'로 요약될 수 있는 신기한 작품이다. 소설을 읽어보시면 어떤 뜻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알마의 페이스북 소개 글에는 궁금할 수 있는 설정을 잘 정리해 놓았는데, 특히 책 표지 그림의 의미,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연합뉴스의 책 소개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 파투산의 뜨겁고 눅눅한 공기 속에서 목숨을 건 두뇌싸움과,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확장하는 경험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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