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옥타비아 - 2059 만들어진 세계 활자에 잠긴 시
유진목 지음, 백두리 그림 / 알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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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상상할 때 우리는 첨단의 기술과 그 기술이 열어갈 새로운 사회를 상상한다. 당연하게도 그 사회 속에서 기술의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젊고 건강한 자신을 상상한다. 그러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미래가 다가오는 만큼 나 또한 나이 들고 늙어간다. 사회의 한 부분이 발전하는 만큼 다른 부분은 남겨지고 도태될 것이다.


디스옥타비아: 2059 만들어진 세계(알마, 2017)는 유진목 시인의 글과 백두리 작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운문과 산문, 픽션과 논픽션, 글과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며 농축된 만들어진 세계를 보여준다. 한겨레가 선정한 ‘2017 올해의 북디자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표지에도 공을 들였다. 절제되어 있지만 초현실적인,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무채색의 풍경 위에 가느다랗지만 붉게 빛나며, 날카로운 각을 세우는 기하학적인 직선들은 이 책이 머금고 있는 서늘함과 뜨거움을 암시한다.


일흔여덟 나이의 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요양보호 시설 엘더에 수용되어 살아야 할 이유도 없으면서 자신을 살려두고(p. 53)” 있다. 제목에서 연상되듯 이 세계는 언뜻 유토피아로 보이면서 또한 디스토피아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함과 동시에 체제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안온한 삶을 보장한다. 가부장제와 낙태죄, 출산과 양육을 인간의 본성이라며 강요하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는 없어졌지만, 아이를 낳는 결정과 그에 따르는 책임, 한정된 자원의 배분과 노동, 노후의 삶은 국가가 아주 엄격하게 감독한다. 심지어 율리와 같은 간병인들은 엘더에서 태어나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평생을 간병인으로 산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에서 바깥세상을 꿈꾸는 헤일셤의 아이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모는 작가였으며 죽기 직전(혹은 죽은 직후)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글을 쓴다. 그 기록이 시간의 흐름과는 거꾸로, 2059831일에서 시작해 713일까지 전개되며 흑백 일러스트와 교차한다. 역순이지만 혼란스럽기보다는 만들어진 세계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방식으로 무리 없이 읽힌다. 책을 읽은 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뒤에서부터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번에는 퍼즐 맞추기에 연연할 필요 없이, 죽음을 찬찬히 맞이하는 모의 마음과 그 눈에 보이는 풍경들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므로.


디스옥타비아라는 조어는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의 이름과 디스토피아를 합친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이자 여성, 하층 노동자로 겪었던 차별과 이질적인 세계들의 갈등(또는 공존)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진목 시인은 그 중 블러드 차일드(비채, 2016)야생종(오멜라스, 2011)에서 몇 오라기의 반짝이는 문장을 빌려와 만들어진 세계에 섬세하게 짜 넣었다. 물론 빌려온 것이 문장만은 아니다. 배제와 차별을 날카롭게 감지하는 감수성, 그 어긋남을 증폭해 보여주는, 잔인하고도 가차 없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 그러나 그 세계에 삼켜지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는 인물들 또한 이 작품에 녹아든 옥타비아의 색이다. 반면 소설을 읽는 속도로는 소화하기 힘든, 아린 감정이 농후하게 배어든 문장들은 유진목 시인의 색이다. 그리고 백두리 작가의 흑백 일러스트가 두 색을 감싸 안으며 만들어진 세계를 확장한다.


SF는 미래를 상상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비춘다. 이 작품에서 나이 든 모가 돌아보는 과거 또한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와 세계의 나이 듦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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