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재구성 - 어느 실천가의 반성과 전망
민경우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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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무엇인가.
아니, 대한민국의 진보란 무엇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진보는 곧 태생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찍이 친미주의, 아니 숭미주의와 반공주의는 한국에서 '종교'였다.
해방 후 미군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로 인해,
또한 인민들의 '동질화'를 위해 '반공'을 국교로 채택했고,
이는 한국에서 그 어떤 신앙보다도 더 절실하고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다.
반공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했고 친미는 자신의 개인적 소신 및 성향이 아닌
곧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그 어떤 국정 철학도 없이 끌려다녔던 남한은
지독한 숭미주의자인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조차 놀랄 정도로 '빨갱이 때려잡기'에 혈안이 되어
미국 숭배를 몸소 실현하는 '반공의 교육장'이 되었다.
빨갱이는 반역이다. 한국전쟁 후 '평화통일'을 부르짖는 것 역시 반역이 되었다.
우리에게 통일이란 없으며, 만에 하나 그 가능성이
단 1%라도 열려있다면 그것은 평화통일이 아닌 '북진통일'이었다.

태초부터 피를 철철 흘리며 우리 앞에 다가온 대한민국 이 땅에서
진보란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되었다. 진보는 곧 빨갱이로 귀결되었다.
이땅에서 보수란 곧 친미주의로 귀결되었다. 극우는 곧 친일파와 동의어였다.
'민족평화'를 이야기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땅에서 진보는 심장을 내놓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는 '병영국가'를 꿈꾸며, 걸핏하면 '목숨을 걸고' 운운하던
위대하신 가카 덕택에 수십 년 간 이 같은 '국가 고유의 개념'이
이어져 올 수 있었고, 유신의 칼날 아래에서 진보는 '범죄'가 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단 한 번 성공한다.
이 서슬 퍼런 땅에서 단 한 번 주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잠시나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87년 6월의 기억은 그래서 '거룩하다'.

돌이켜보건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진보'가
사회의 전면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87년 이후 이뤄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시 한 번
진보 세력이 수면 위로 올라와 전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가 진보를 가장한, 혹은 진보를 이용한 극우, 보수 세력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진보의 재구성]이다.
제목이 너무 지겹고 고리타분하다.
진보는 언제나 재구성된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문제는 너무 '똑똑해서' 탈이다.
극우세력들처럼 한 곳으로 모아지는 '뚜렷한' 선이 없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동질화'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세력은 하나의 주제로 재빠르게 결집되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정권의 주체가 극우세력으로 '진화'하면
전 인민의 동일화, 즉 전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인민들은 '다양성의 표출'과 그에 따른 '갈등의 심화'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를 '전체'와 '국가'라는 이름 아래 억압당한다.
대신 민중들이 보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
당신네들이 굳이 신경 안 써도 된다."
라고 외치는 집권 세력의 이벤트성 포퓰리즘이다. 

반면 진보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소수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진보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보수 세력이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민주주의를 유린해야 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보수의 철학 속에는
민주주의의 기본 방향과 엇갈리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력의 결집부터가 어렵다. 서로서로 한 마디 씩의 말들을
그들은 보수처럼 '동질화'라는 이름으로 통일할 수가 없다.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가치 체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커다란 바운더리 내에서 끝없는 가지치기를 한다.
이들이 뭉칠 수 있는 것은 진보 세력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커다란 목표'가 있을 때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87년의 '민주화' 였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진보라는 세력이 한 번 집결하면 충분히 나라를 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목표의 달성'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의견들을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줄만한 방법으로 조화를 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이란 제목은 진부하다.
87년 체제 이후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이
한번이라도 '재구성'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재구성'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 소개를 살펴보았다.
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중심이었고
졸업 후 구로, 영등포, 관악 등지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통일 연대 사무처장,
한미 FTA 저지 국민대책위원회 정책팀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이정도면 기회주의가 판치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좌파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더욱 신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는 자신들의 성찰이야 뻔할 것 아닌가.
지금껏 진보진영의 자기성찰이 없었던 까닭에
이나라 진보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것이 아니다.

궁시렁궁시렁.. 이런 삐딱한 시각으로 책을 접했다.
진보에 대한 환멸과 회의감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닐진데
단순히 '장삿속'으로 책 제목에 '진보'란 단어를 떡하니 넣어놓고
(나같은) 어중이 떠중이나 현혹하는 그저그런 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처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을 집어들고 나서
'또 상술에 낚였구나'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보기 전부터 내 시각은 삐딱했다.
이것은 책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진보를 향해 느끼는 '냉소주의'에 가깝다.  

책의 처음은 역시나 촛불로 시작한다.
촛불은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회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 것인가 보다.
역사가 알아서 판단해 주겠지만 촛불은 참 대단한 것이면서도 편한 것이다.
은근슬쩍 촛불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반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지 않은가.

촛불은 이제 일종의 '면죄부'이다.
진보는 자신들의 잘못과 성찰을 촛불에 대입한다.
"나는 진정 6월의 촛불에 감동받았다" 라고 시작하는
진보세력의 참회는 촛불세대를 하늘로 두둥실 띄워주는 역할을 해서
그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만족감을 주면서 '위'에서 '아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지금껏 진보가 했던 수많은 한심한 짓들을
'현자'의 눈으로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것뿐인가.
동시에 진보는 촛불세대에게 '적'을 규정하면서 그들의 결속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진보세력과 촛불세대들의 표면적인 적은 MB정부이겠지만
진보가 내세우는 실질적인 적은 그들이 아니다. 그것은 20대이다. 

촛불시위의 촉발은 비록 10대의 고사리같은 손이었지만
(그것이 단 두 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지속될 수 있기까지는
20대, 30대 그리고 일부 40~50대의 참여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진보는 지금의 10대를 '촛불세대'로 규정해놓고
취업에 눈이 먼 20대와 니들은 다르다며 일종의 우월감을 부여한다.

여기서 20대는 실로 한심한 존재로 부각된다.
취업에 쩔쩔 매는 찌질이들이 자신의 동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니까
뭔지도 모르고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간
한심한 찐따가 되는 것이 진보가 바라보는 촛불정국의 20대다.

촛불을 빗대며 자신들을 반성함과 동시에
촛불세대를 신격화하고 (최장집의 말처럼)촛불은 '촛불주의'가 된다.
자신들의 참회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세대 간 적을 규정한다.
촛불정국의 20대. 진보가 생각하는 그들의 역할이란 촛불세대들에게 심리적 우월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그간 잘못을 희석화시켜주는 편리한 도구이다.
(쟤네들이 의욕감도 없고 능력도 없는 세대들인데 그게 꼭 우리만의 잘못이야? 라는 따위)
  

그래도 이 책에서의 촛불에 대한 부분은  최소한 특정 세대를 거들먹거리며
눈물 질질 짜는듯한 역겨운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5~6월의 촛불대오는 소통과 네트워크로 무장한 수평적 민주주의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토론과 논쟁을 즐겼으며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관을 표현했다.
이는 지도와, 대중, 민주집중제를 주장하며
일사분란한 단결을 강조했던 운동진영의 조직문화와 다른 것이었다."
작가의 경력도 그렇거니와 이 정도면 허무맹랑한
헛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책장을 계속 넘기기로 한다.

이 책은 진보의 반성과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
민주화 전후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는 방식을 취한다.
6월 항쟁의 근본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86년 10월의 '건국대 사건'이나
한국 학생운동사 최악의 비극이 되어버린 1996년 '연세대 사건',
2001년 '강정구 교수 사건' 등이 그것이다.

한총련과 학생운동에 대해 그는 "한국의 학생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84~87년 학생운동의 활성기와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위장된 민선정부 아래에서 반 독재투쟁은 여전히
대중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에 전대협과 한총련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연대사건'이 왜 민중과
철저하게 고립될 수 밖에 없었는지 말해준다고 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학생들의 통일운동의 진정한 동력은 통일에 대한 열정 그 자체에
있었다기 보다는 1987년 6월에 기초한 강력한 반 독재투쟁이 있었다.
반 독재투쟁이라는 동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한 통일 구호도
용인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1996년 연대 사건의 학생들이 철저히
고립된 것은 반 독재투쟁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학생운동이 연대사건 이후로 몰락해버린 것은 '현실과의 괴리감'에 있었다.
'연대사건'이 그 자체가 학생 운동 몰락의 근본적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무너져버릴 것 같은 허약한 모래성에 물결이 살짝 친 것 뿐이었다.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은 그 목적을 잃어버렸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학생운동의 근본적 동력은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민경우의 말처럼 모든 이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던 '민주화'라는 대승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생경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강경한 통일구호도 용인이 되었던 것이다. 

반공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종교적 믿음이었다면
그 시절 학생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믿음이 되었던 것은 '민주주의'였다.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리라.

학생운동은 민주화'이후 목적과 당위성을 잃어버렸다.
목적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계급간 불평등의 해소라던지 더 나은 복지정책의 추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민주주의에 돌입한 사회에서 그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는
비록 이론상으론 존재했을지언정 그들을 '민주주의'라는 종교와 같이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움직이게 하기에는 동력 추진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87년 이후 근 10년 간 학생운동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완전한 '민주화'가 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신군부의 잔재는 노태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이어졌고
전교조의 결성과 분신정국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처럼 추상적인 '반독재' 투쟁에
의존하고 있었던 그들의 자멸은 예견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민경우가 말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의 제시에 앞서 그는 최소한 '책임회피'는 하지 않는다.
진보진영의 무너짐과 무능력함을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조류 탓을 하는 편하고 당연한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설령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아니 분명히 그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한심하게 시대 탓이나 하면서 나약한 소리나 하는 것이
언제부터 '진보'란 이름으로 불리워졌단 말인가)

"2008년 주류 운동진영은 세 가지 점에서 중대한 한계에 봉착했다.
첫째는 조직 역량과 대중적 동력 사이의 괴리, 둘째는 대중적 동력과
정치적 권위 사이의 괴리, 셋째는 급변하는 정세와 전통적인 인식 구조 사이의 괴리다.
87년 6월의 승리는 86년 건대 사건과 같은 좌경맹동주의를 청산하고
참다운 대중 노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했다"

핵심은 언제나 원론적일 수 밖에 없다. 민경우의 해결책 역시 원론적이다. 그는
"진보진영의 핵심적인 과제는 정책과 노선, 문화와 감수성에서 2008년 촛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된 대중의 분출 등 국민 대중,
특히 수도권의 청장년층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민중들과 진보 세력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어떤 세력들보다 더욱 더 민중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가치체계를 추구하는 진보가 
이토록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2010~12년 진보진영의 최소 목표는 '현대적, 대중적, 진보적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고
최대 목표는 민주당의 '좌파'와 함께 연립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한국 정치판 특유의 보수(민주당)와 극우(한나라당)의 싸움터 속에서
보수 속 '좌파'와 진보세력이 연립정권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현실성이 없는 소리이다.
어디까지나 최대목표이겠지만. 또한 진보정당의 새로운 창당이 국민들에게
'프레시함'으로 다가올 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그 얼마나 많은 정당들이 창당되고 공중분해되었는가.
또 '신선함'을 위시해서 얼마나 많은 진보를 표방한 정당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가. 개인적으로 창당보다는 현재의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개선과 발전이 일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방향이 정확한 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반 정부 성향은 결코 '진보의 지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보를 추구해서 현 정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능하고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정책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행태에 불만인 것이다.
지금처럼 진보 진영에게 유리한 시대는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음 대선까지 진보가 확실하게 민심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진보가 주류를 차지하기까지는 십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MB정권의 뼈아픈 실책을 경험했던 보수 진영에서 이 위기의 시기가 지나면
포퓰리즘조차 조소의 극치가 되는 MB처럼
멍청한 인간을 내세우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의 현재 행태는 실망적이기 그지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 사회의 밝은 미래는 진보진영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끝까지 나는 진보 진영을 비판할 것이다.
진보 진영의 생명력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아부와 고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는 자기 비판과 혹독한 말들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현재진행형 생동감'이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면에서 '진보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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