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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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이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위의 말은 월간 대서양이라는 잡지에서 본 작품 [대중의 반역]을 일컬어 했던 말이다.
홍보문구의 과장됨은 감안하더라도 사회계약론과 자본론에 비견될만큼 이 책이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책을 접하게 됐다.

말그대로 이 책은 '대중'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의 발행년도는 20세기 초,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지금의 대중들이 사이버 공간을 중심으로 집단을 자유롭고 유동적이게 구성하며
이른바 '집단지성'을 창출하면서 창조적인 유기체로 움직인다면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20세기 초 대중들은 하나의 '대의'를 통해 움직이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20세기 초, 즉 아직까지 사회주의가 일국사회주의,
스탈린 체제로 변질되기 전 하나의 이상향을 보며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 대한 향수같은 게 있다.
(이런 향수의 근본적 뿌리는 레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애잔함과 그리움은 사회주의는 물론 자본주의가 신제국주의로 변질되기 전,
다시말해 대공황 이후 일반이론과 뉴딜이 만나며 다시는 오지 않을 자본주의의
유토피아 시절이었던 1960년대, 딱 68혁명 전까지의 기간도 포함이 된다.
  

 

그 시대의 향수는 그 시대의 사람들, 즉 대중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본작은 그 시절의 군중을 조명하고 있다.

그가 바라본 그시대의 군중, 아니 이 책이 쓰여졌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우리 시대만큼 군중이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역사상 언제 있었을까"라고 말한다.
군중의 힘이, 대중의 힘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막강했던 시대라는 말이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식물에 이로움을 주는 공공생활방식을 얻기 위해
온갖 실험을 다 해본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
이었다는 과거 역사의 단언과 함께.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대중'은 결코 긍정적인 시각이 아니다.
"'대중'이라 함은 삶의 계획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가능성과 권력이 막강하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나오는데,
"무리가 많기 때문에 대중이 아니라, 소극적이기 때문에 대중이다"
라는 것. 이 한 문장은 이 책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대중은 무력하고 소극적이다.
반면, '소수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훌륭한 노력을 경주하는데
이들을 우리는 선택된 사람, 고귀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즉 우리가 보는 '선택된 사람'은 실상 타의에 의해
선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훌륭한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들로
이들의 삶은 영원한 긴장의 연속이며 훈련인 것이다.
그들이 흘리는 땀과 눈물겨운 노력은 대중들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호칭과 경이로움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중은 매우 영리하며,
그 어느 세대보다 뛰어난 지적능력을 갖고 있지만
자신이 지적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 생각 자체가
스스로를 폐쇄시켜서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대중의 반란'은 이러한 평균인들의 폐쇄성에서 기인하며,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거대한 문제는 대중의 반란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대중의 반란'은 혁명과 같은 역사적 전복,
앙시엥레짐의 타파와 동의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오랜 세월 인간의 본성과 옳음, 인권의 자명함이
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폭발한 거대한 불꽃축제라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본 저작에선 완전한 '모순'에 해당된다.

일단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고 있는 대중의 정의는
결코 인민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대중은 '즉흥적'이고,
때론 오랜 기억도 역사 의식도 없는 평범한 이들에게 좌우될 수 있는 '나약함'자체이다.
즉흥적임과 나약함의 근본적 메커니즘이 자기폐쇄성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지성이 뛰어나게 진화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어떤 정통성도 없는 '일부 평범한 인간'에게 휘둘리게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대중의 나약함과 나태함, 폐쇄성 속에 등장한 것이
생디칼리즘과 파시즘 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가 말하는 대중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한없이 쪼개진 구심점 없는 수많은 덩어리들이다.
그같은 덩어리들 중 특정한 덩어리들,
즉 하나의 동질적인 대중이 공적권위를 제압한 후,
반대집단을 모두 진압하고 전멸시키는 경우..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거의 모든 국가에서 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분명 파시즘, 나치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만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를건 또 뭔가?  어차피 그들 역시 의회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권력의 분출에 있어서는 매일반이다)
 

 

"대중이란 오늘날 사회의 모든 계급에서 볼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압도하는 종류의 인간"
이며
그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때는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적 폭력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은 사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목에서 느꼈던 '혁명'과 같은
고상한 낭만적 이상주의가 아닌, 일국 사회주의의 '주체'로서의 대중을 만난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럽을 거대한 국민국가로 건설하는 일이야말로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고 말을 한다.
이같은 바람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EU의 형태로 토대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줄기차게 이야기하던 유러피안 드림이라는
유럽 사대주의는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는 것 같다.

글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연 EU가 '드림'이 될지 의문이 간다.
반미와는 뗄레야 뗄수가 없는 EU가 최소한 '상징성'에 있어서
미국만큼 성장한다면 그때 우리에게 남은 건 '전세계의 화합'인가,
아니면 '미제국주의'에 반하는 '유럽사대주의'인가.
무조건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EU의 무시무시한 성장이
과연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바라던 '성공의 길'일까.

그는 자유주의자 이다.
본작품에서 자유주의를 정의하길,
다수가 소수에게 권리를 부여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지상에 울려퍼지는 가장 고귀한 외침이고,
그것은 강한 적 뿐만 아니라 약한 적과도 공존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꿈꾸었던 유럽의 국민국가가 '유럽제국주의'에 빠지지 않고 소수의 이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것은 너무 유토피아적인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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