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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 분노 없는 시대, 기자의 실존 ㅣ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박래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1월
평점 :
기억,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
싱싱한 생물학적 젊음 하나가 전부였던 대학교 1학년, 과제를 명목으로 강화도를 답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산한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어느 노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기약 없이 기다리는 버스가 지겨웠던지 남자분이 먼저 말을 건네오셨다.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곳에 젊은이들이 어떤 연유로 오게 되었냐는 물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를 통해 그 분이 오랜 기자직에서 퇴직하시 고 현재 노년을 보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나의 전공 분야에서 오래 몸 담으셨던 분이기도 하거니와 마침 관련 인터뷰 과제도 있었던 지라 그 분과의 만남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몇 차례 간청을 통해 안국동 어느 카페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사실 인터뷰라고 하기 보다 현직에 있었던 체험과 기억들에 대한 회상 혹은 재생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특히, 부마 사태와 유신독재 당시 언론사 파업과 투쟁에 대한 그의 생생한 증언은 얕은 지식과 무딘 눈을 가진 나에게 역사적 사실이 지닌 아우라와 함께 미묘한 공포마저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누군가의 고백과 무용담은 얼마나 우리를 흥미로움에 몸서리치게 하던가!
저널리스트들의 치열한 이야기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는 나의 경험에서 느낄 수 있었던 한 시대를 풍미한 전현직 저널리스트들의 담백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자서전 중 가장 굵직하고 역동적인 카테고리를 툭하고 떼어온 것처럼 비장함마저 내뿜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박래부 편의 첫 장은 ‘나의 사망기사’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목으로 시작된다. 직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 때문일까, 기자로서 그는 아주 치열하고 진중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왔고 그가 겪은 현장 기록과 발자취를 고스란히 자신의 생각과 언어로 풀어내고 있었다. 사실 프롤로그를 아주 재치 있는 형태로 제시하는 그의 창의력도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한 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책으로 묶어내는 입장으로서 화자의 수줍은 감격마저 느낄 수 있었다. 구성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가 쓴 컬럼들, 특정 현장기록과 사건, 그의 사람들. 단초한 듯 하지만 문학 기자 출신답게 탁월한 문장력과 서사로 단숨에 책장을 넘겨버리게 만들었고 특히 중간중간 끼어있는 흑백 사진은 그가 겪은 시간을 함께 느끼며 직접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을 더듬어 보게 만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박래부의 눈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데드라인’ 섹션에 소개 되고 있는 그의 주옥 같은 컬럼들이다.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듣고 공유하기 좋아하는 성향이라서 그런지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그의 글이 가장 마음을 끌었다. 실제 한국일보에 실린 그의 컬럼들을 통해 그의 성향을 이해하고 생각의 깊이를 키울 수 있었는데 특히, 최근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되고 있는 정치적 방향성의 대립, 고령화 사회, 학벌 중심 세태 등에 대한 그의 사유와 통찰력은 아주 선명하고 또한 시원했다. 그리고 그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진술했으리라 짐작 할 수 있었던 현장 기록과 그 사건들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인물, 시간, 사건으로 얽히고 설킨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듣던 옛 이야기처럼 우리를 매료시킨다. 7,80년대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겪으며 역사 교과서에 뚜렷이 남겨질 사실과 진실들은 우리의 침을 마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널리스트 박래부의 글과 사람
글의 힘이라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의 힘이기 전에 사고와 논리의 힘에서 비롯됨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어느 기자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보기에는 (물론 내용적인 구성도 매우 흥미롭고 알차지만) 그가 보여주는 깔끔한 문장은 글을 좋아하는 나에게 꽤 건강한 자극을 주었다. 그는 다독했고 감성과 미학에 대한 개인적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그 정도의 수준에 이를수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반성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김훈과 각별한 우애가 있음을 보여주며 그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피력하고 있다. 부러웠다. 주위에 배울 것이 많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김훈을 비롯 많은 지인들과 교우하며 얻은 값진 경험과 넓은 시야를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국의 저널리즘, 늪 그리고 소망
무엇보다 책 제목(분노 없는 시대, 기자의 실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기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고 지금도 그 과제를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언론은 죽었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학부 때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에서 배운 가장 기본이 되는 언론의 역할과 힘은 권력과 재력 앞에서 무릎 꿇고 그들의 앞잡이가 된 지 오래다.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이 넘쳐나며 신념은 무너지고 아첨과 욕심만이 남았다. 국민의 신성한 알 권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바쁜 언론사가 판을 치는 반면, 우리가 원하고 마땅히 그래야 할 참된 언론의 모습은 오히려 괜한 짓 하지 말라며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다. 화자도 이러한 점에 대해서 MBC 이상호 기자의 폭로 사건을 예로 들며 기자들의 각성과 그들의 사명감에 대해 호소했고 나아가 이 사회에 대한 정의와 진실이 언제나 등대처럼 밝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세상과 사람의 창
그는 이 책을 통해 시대를 개탄하고 세상을 걱정하고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말 그대로 기자라는 신분에 대해 충실하고자 한다. 책의 마지막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의 첫 문장은 ‘기자생활을 돌아보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성찰하는 일’이라며 거룩한 자신의 감회를 보이며 독자마저 매우 숙연하게 만든다. 그는 직업적 존엄성도 인정 받지 못하고 사회적 복지도 빈약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변함없는 진정성을 가지고 임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기자를 꿈꾸는 풋내기 학생부터 밤낮없이 사건을 쫓으며 뉴스를 전하는 현직 기자까지 그 모두에게 그의 이러한 나지막한 외침을 들려주고 싶다. 기자는 세상과 사람의 창이 되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분노 없는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은 기자의 실존과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그가 보여주는 그 자신, 박래부 기자의 발자취는 잿빛 하늘 아래 사는 우리에게 희망적인 불씨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