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 좌절과 무력감, 그리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녀에게투사될 때 학대와 방임이 일어난다. 무력한 아동에게힘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기도 한다.
그래서 실직한 부모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아동 학대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동 학대는 주로 어디에서 발생할까? 그리고 누가주로 학대를 저지르는 걸까? 이미 이 책을 읽고 있는독자라면 정답을 놓칠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엉뚱한 답을 내놓을 게 틀림없다. ‘아동 학대는 주로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일어난다.‘

집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티브이 속 학대는 껄끄러움 없는 분노를 이끌어낸다. 미디어는 이런 설정을 확대재생산한다. 어느덧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벌어지는 학대 영상이 한국 사회의아동 학대를 상징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자식일 터인데 설마 친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학대했을까?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아주 드물지 않을까? 이런 질문은 또다른 인식의 왜곡을 증폭시킨다.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서 벌어진 아동학대가 친부모에 의한 게 아니라면,
지목될 수 있는 범인은 빤하다. 바로 계모이거나 계부다(이 단어가 사회적 편견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지만, 이 책에선그대로 쓰겠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계부모나 친부모 중 어느 쪽이 상대적으로 학대 가능성이 더 높은지 의문을제기할 수도 있다. 이는 아동을 둔 전체 가구 가운데계부나 계모의 비율을 따져본 뒤 다시 전체 아동 학대 사건 중 실제 이들이 학대 행위자인 사건의 비율을 따져보면 될 일이다. 현재로선 이 같은 통계를 구하기 쉽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성준 임상심리 전문가는 "학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고문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고문을 받다 보면 피해자는 옷도 못 챙기고 더러워지고 무기력해지는데그 모습을 보고 고문 가해자는 ‘이런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는 고문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것이다. ‘사후 정당화‘다.

방임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말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방임이 아동 학대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의사, 간호사, 교사 등 아동 학대를 목격했을 경우 반드시 신고해야 하는 신고의무자조차 방임을 학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적지 않다. 신고 의무자들의 인식이 이러할진대 방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더욱더 낮을 게 틀림없다.

아이는 맞아서 아프기도 하지만 배고파서, 치료받지 못해서, 돌봄을 받지 못해서 아프기도 하다. 정도가 다를지 모르지만 아이가 아픈 건 다같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 사회가 ‘동반 자살‘이란 단어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어른들이합의한 뒤 실행하는 동반 자살과 자녀를 죽인 뒤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녀를 데리고 자살하는 ‘자식살해 후 자살‘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부 인구 집단이 주장하는 ‘평등‘권보다는 우리 모두가 가진 자유에 관한 ‘자유‘권이 반응 면에서는 훨씬 더 우호적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집단 기반의 편의 제공 주장과같은 평등권의 경우 연방 대법원 입장에서는 여러집단 중 하나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점점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연방 대법원은 당연히 이러한 모험을 피하고 싶어 한다. 반면 자유권은 모든 미국인(보다 정확하게는 미국이 관할하는 영토 내의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누려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성적인 친밀성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법원에 접근할권리 또한 있다는 점은 이 나라에 새로운 집단이 아무리 많이 생기더라도 지속될 것이다.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이 평등 패러다임에 의해보호받는다면, 이는 결국 여자는 화장을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강화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이 여성에게 업무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표현하는 자유권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더 ‘남성적‘이 되거나 더 ‘여성적’이 되라는 요구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가 전환을 하면, 그 사람은 모든 상대방에게 전환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패싱의 경우에는 자신의 인간관계에 속하는 관객의 숫자만큼 많은 벽장이 존재한다. 이 점이 커밍아웃을 시시포스적 과업으로 만든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 지 12년이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떤 상황에서 내가 패싱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특정한 유형의사람이 될 권리가 있는 한, 그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환이 동성애자와 전(前) 동성애자를 구분하고 패싱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동성애자를 갈랐다면, 커버링은 ‘노멀‘과 ‘퀴어‘를 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적 판타지는 변태적인 게 아니에요." 오르빌은부드럽게 말했다. "좌절된 거죠."

나는 성인 동성애자를 "당연히" 보호하면서 동시에 ‘당연히‘ 아이들이 동성애자가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패툴로의 이중적 확신 앞에서 계속 걸려 넘어졌다. 이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는 패러다임의 지속적인 생명력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HIV감염인들은 ‘당연히‘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지만 ‘당연히‘ 그 상태를 퍼뜨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처럼 말이다. 질병이라면 이러한 입장이 말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