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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신의 역사 - 서양은 어떻게 인문학을 부흥시켰는가
루돌프 파이퍼 지음, 정기문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7월
평점 :
알라딘의 인문신간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긴장감 넘치고 즐거운 일이다. 외국어 서적을 많이 구입하기에 구매는 교보문고를 주로 이용하지만 국내 인문서적의 정보는 알라딘에 더 의존하는데, 이번에 월척을 건졌다. 며칠 전에 다른 대학 도서관을 통해 어렵게 입수한 두 책 중 제2권이 번역되어 나오다니! 바로 구입해서, 할 일이 산더미같은데도 하루 내내 이 책만 읽어버렸다. 두번 세번 네번 더 읽어야 할 책이지만, 우선 한번이라도 읽으니 어찌나 뿌듯한지. 원서로 읽었으면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리고 또 번역자의 도움 없이 전문 용어와 인명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실한 번역도 좋고, 해설자인 안재원 선생의 글도 마음에 와 닿는다 . 동양이건 서양이건 고전연구를 통한 인문학은 '지금의 현실에 맞게' 해석해 달라는 강박적인 요구와 '그걸 지금 왜 들여다 보느냐'는 몰이해, 이 두 가지 모두에 고통받는다. '인문학'과 '고전'을 앞세워 여러 책들이 나와 독자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전문가들에 의해 지루하고 재미없는 연구가 깊고 넓게 축적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번역한 정기문 선생의 노고에 감사하고, 또 해설을 써 준 안재원 선생께도 감사한다.(일면식도 없지만^^) 그리고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도서출판 길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욕심을 내자면, 이 책의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의 History of Classical Scholarship도 번역되어 나왔으면 한다. 원서는 독일어(Geschichte der Philologie)이지만 휴 로이드 존스가 해설하고 알란 해리스가 번역한 영역판을 읽는 중이다. 존스의 지적처럼 루돌프 파이퍼의 책은 19세기 독일문헌학에 대한 기술이 너무 소략한 것이 아쉽기에 빌라모비츠의 책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게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19세기 서양의 문헌학이 같은 시대 서양인들에 의한 중국연구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안재원 선생의 해설에서도 알 수 있듯 16세기 이래 서양고전은 동양에 많이 수용되었고, 그 역으로 동양고전도 서양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보통은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철수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18세기와 19세기는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학진 명저 번역 시리즈로 나온 데이비드 E 먼젤로의 <진기한 나라 중국>은 예수회시기까지의 서양 중국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로 서양의 중국학이 끝난 것은 아니고, 또 예수회만이 중국을 연구한 것도 아니다. 이 점을 보충해줄 수 있는 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David B. Honey의 Incense at the Altar: Pioneering Sinologists and the Development of Classical Chinese Philology이다. 냉전시기 미국식 지역학의 일환인 중국연구(Chinese Studies)와 달리 서양의 중국학(Sinology)은 문헌학을 그 방법론으로 삼았고, 이 문헌학 즉 pilology는 곧 그 동시대의 서양 문헌학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서양 문헌학에 대한 정보가 절실히 요청된다. 파이퍼의 책이 소개된 김에, 서양고전학 연구자들이 빌라모비츠의 책도 어서 번역해 주었으면 한다. 서양고전문헌학에 대한 국내 연구자의 소개서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