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물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학교를 없애자!’라는 비교적 과격한 주장을 했던 사람으로만 기억되던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게 해준 책. 책에서는 다소 과장스럽게도 “우리 시대의 현자”로까지 소개해놓았지만, 사실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그는 현자란 이름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책 속의 한 구절이다. 그런 따뜻한, 어떻게 보면 바람직할 수도 있는 언어생활이 언어를 도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를 얽어매고, 또 구속해댄다. 무의미한 정치 슬로건 속에서, 무분별한 광고 문구 속에서 그런 것들을 무척 자주 볼 수 있다. 사실, 언어뿐일까? 교육이라는 제도 역시 그것이 사회 진입의 도구가 되는 순간 우리를 초등학교부터 대학과 유학을 거쳐 성공된 인생으로 이어지는 일방통행로 속에 가둬버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과, 내가 가난한 이유가  학교에서 낙제했기 때문이라는 사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특히 가난할수록 학교에서 낙제할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그렇다." 

여유롭게, 혹은 더 없이 구체적이었거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받을 수 있던 교육이 사회화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것은 곧 신분 상승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그 도구가 어느새 우리를 신분 속에, 그것도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 속에 가둬버린다. 같은 식으로, 고통을 덜어주고, 우리가 품위 있는 삶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 할 의료제도 역시 어느덧 우리를 "공인된 건강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안달하게 만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신 질병이 발명되는 세계 속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린다. 교육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서 '교육제도'로 넘어가버렸듯, 자신의 병을 인식하는 주체 역시 자기 자신에서' 의료체계', 즉 의사들과 그 뒤에 있는 거대한 기관이나 기업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정치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학문 속에서, 각종 구호 사업이나 심지어는 환경 운동, 거기에 종교 속에서까지 폭넓게 늘어만 가고 있다. 일리치는 이것을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는 문장으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명쾌한 현실이지만, 그러나 일리치는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단번에 알아채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말한다. 선의로 위장한 말들, 아니, 애초에 시작은 최선이었던 말들의 영향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에, 그것이 타락한 최선을 우리가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일리치가 택한 방법이 바로 "과거로의 여행"이다. 그는 우리에게 과거로 돌아가 성찰하라고, 정확히는 과거 속을 여행하며 그 시대의 시각으로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 주변의 세계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낯설어졌는지,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디오피아의 굶어죽는 어린 '생명'를 도웁시다"라던가 "우리는 지구를 '관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같은 말 속에 숨은 의미를 '깨닿고' 말 그대로 전율하게 된다. 

...  

예전에 이반 일리치의 책을 읽고, 어렵고 난해한 문장에 당황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 대담집이라서 그런지, 혹은 번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다. 그동안 이반 일리치 글의 난해함에 시달렸던 분이나, 그저 교육가나 환경운동가 쯤으로만 그를 알고 있던 분은 새로이 사상가로서의 이반 일리치 속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의 인생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읽은 책들의 리스트는 말 그대로 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혹한 이야기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물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최근 들어 공각기동대로 더욱 유명해진, 그러나 풍문만 떠돌던 작가 드디어 번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종말 전쟁 - 전2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총체 소설.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을 읽게 만든 건 신문기사에 실려 있던 알 수 없는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총체적 인간, 총체적 난국, 총체적, 총체적. 그리고 총체 소설. 예전부터 알 듯 모를 듯한 말만 보면 괜스레 호기심부터 세우던 나에겐 당연한 결과다. 왠지 익숙한 말이지? 근데 모르겠지? 궁금하지 않어? 자, 읽어, 읽어, 읽어보라구.

그래서일까? 처음 소설을 읽으며 내내 혼란스러웠다. 사실 분량도 만만치 않은 책이다. 숱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등장하고, 또 등장한다. 읽으면 알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책이 끝나기 전에 죽어버린다. 기사에도 나와 있듯 이 얘기의 결말은 ‘학살’이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전쟁 중의 인간들이다.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 인물들조차 전쟁 중이기에 허무하게 죽곤 한다. 어쨌거나, 일견 이야기 파악하랴, 일견 인물들 외우랴, 그러면서 소설에 드러나는 총체 소설적 분위기를 찾아내랴(사실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이유가 그거 아닌가? 도대체 총체소설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 나의 독서생활은 상당히 분주해졌다.

그러나 2권 모두를 읽고 난 지금, 나는 더 이상 그 단어에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의 저자에 빠져버렸다. 생생하다, 그리고 살아 있다. 요사, 대단한 작가다. 어느 작가와도 닮지 않은 다소 특이한 문체로 그는 우리를 전쟁이 벌어지던 남미의 한 오지로 데려다 놓는다. 뭐랄까, 대개의 소설을 읽으며, 특히나 그 소설이 잘 쓴 소설일 경우, 우리는 그 소설의 인물에 동화되거나 감정이입되곤 한다. 그러나 그의 문체는 우리들을 그 인물들 옆에 세워 놓는다. 인물의 심리 속이 아니라 그들이 생활해 나가는 그 현장으로 정확히 데려다놓는다. 그들이 되어 줄거리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줄거리를 겪도록 한다.

고백하자면, 소설 전체를 꼼꼼히 읽지 못했다. 위에 말했듯 1권은 강박 관념에 시달려서이다. 그리고 2권은 다음이 궁금해서 그야말로 속독하듯이 허겁지겁 읽어내려갔다. 신문기사로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소설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차분차분히 다시 읽고 있다.

그러고 보면 총체소설이 뭔지 알 듯 하다. (진실은, 인터넷 검색하니 바로 나왔다. 디보데란 사람의 소설 분류 중 하나란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소외받은 자와 민초들의 뜨거운 투쟁사를 볼 것이요, 어떤 사람은 정치판의 머리 아픈 음모 게임을 볼 것이다. 따뜻한 사람들은 그 속의 사랑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요, 이론가라면 소설의 구조와 주제를 찾아 한없이 분석할 것이다.

심지어 나같은 사람은 거기서 여성학적 껀수를 끄집어 내기도 한다. ‘책 속의 카누도스는 오늘날 브라질의 지명이긴 하나 풀, 이라는 단어에서 반란군들이 만들어내 붙인 지명이다. 온갖 소외받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든다. 그곳의 일인자는 남자인 선지자이다. 이글의 히로인 후레마는 실존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지방에 산재한 들풀의 한 종류이다. 카누도스에서도 소외받은 사람들이 그녀 곁으로 모여든다. 그녀는 여자이다. 카누도스는 무단 점거된다. 후레마는 강간당한다. 카누도스는 소외된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다. 후레마는 그곳에서 소외된 기자와 난장이의 어머니이자 연인이다.’ 등등. 사실 이 책을 끌어가는 건 카누도스라는 지역과 후레마인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신문을 봐도 그녀의 이야기는 언급이 없다. 왜일까?

사실 이 책은 즐기는 책인 듯 하다. 나쁜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의 즐기는 책, 페이지 페이지 넘겨가며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보면 어느 순간 다음 페이지를 안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그럼 별을 몇 개 줄 것인가? 일단은 네 개다. 원래는 다섯 개이지만, 몸살나게 재미있는 책이라 읽으며 조급하게 한 죄로 하나를 깎는다. 참, 이 책의 모든 배경과 대개의 인물은 실제 사건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