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일에서 개봉했던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를 보면,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아나키스트 루디 두치께가 한 괴한에 의해 총탄에 맞고 부상당하자, 이에 분노한 이들이 집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회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치달았고, 어느 한 독일의 반전인사는 불에 타고 있는 시위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드레스덴!
히로시마!
베트남!”
영화에서 한 반전인사가 외친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그리고 베트남은 폭격으로 인한 대량 인명피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금 공부해본 이라면,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에 있던 드레스덴 폭격을 들어봤을 것이다. 2일간의 공습으로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 일단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에 따르면 20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연합군 측의 조사에서는 20만 명이 아닌 3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나오지만, 미국의 반전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종합적으로 10만 명이 죽었다고 여러 저서에서 주장했다.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20만 명은 조금 부풀려졌을 수도 있고, 3만 명은 너무 축소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6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가 직접적인 죽음과 부상으로 인한 죽음을 포함하여 희생되었을 것이라 본다.
(B-17 폭격기)
드레스덴 공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미 연합군에 의한 공습 희생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은 당연히 전쟁을 시작하고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에게 있다. 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인종청소와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무수히 많이 자행했고,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트레블링카 그리고 아인자츠 그루펜의 전쟁범죄 등을 통해 입증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공습에 의한 독일 본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서유럽 침략 과정에서 공습을 단행했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영국을 침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에 나섰고,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습했다.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공습으로 인해서 대략 5만 명 이상의 영국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 대다수의 독일군 병력과 물자는 동부전선으로 향했고, 비록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1944년까지 있었지만, 1942년부터는 연합군이 서부전선에서 완벽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실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의 활약으로 독일은 승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과 미국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습을 하고 있는 B-17 폭격기 편대)
(영국군의 랭커스터 폭격기)
1942년 3월 영국 공군은 파리 르노의 공장공습에 성공한 데 고무받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발트 해의 유서 깊은 한자 동맹 도시 뤼백에 공습을 가했다. 그리고 4월에는 발트 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인 로스톡에 나흘 밤 연속으로 소이탄을 쏟아 붓는 공습에 다시 성공했으며, 5월에는 폭격기 1,000대를 동원하여 쾰른을 공습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공습을 가했으며, 1942년 8월에는 영국에 도착한 미 육군 제8항공군이 루앙에 있는 조차장을 공습해서 첫 공습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함부르크)
미공군과 영국공군은 주간과 야간에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을 실행했다. 특히나 미군은 B-17 폭격기를 유럽전선에 많이 투입했으며, 그로 인한 군사적 효과는 극대화됐다. 1948년 8월 17일 미공군(제8항공군)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했다. B-17 229대 가운데 36대가 격추되어 소모율이 16%였을 정도로 공군의 피해가 컸다. 주간공습이었던 것과 독일의 촘촘한 대공망이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를 폭격했다. 주간에는 미군이 야간에는 영국군이 몇일간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그 결과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사망했다. 시의 몇몇 구에서는 주민의 치명적 사상자 수가 30%를 넘어섰고, 여성사망자가 남성 사망자보다 40% 더 많았다.
(1945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
전쟁 기간을 통틀어 계산이 이루어지자, 함부르크의 폭격 희생자가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 시에서 징집된 군인의 전사자 비율보다 겨우 13% 낮았다. 그리고 그 폭격 희생자의 과반수는 1943년 7월의 대공습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이후 미군과 영국국은 뷔르츠부르크에서 7,000명, 다름슈타트에서 6,000명, 하일브론에서 7,000명, 부퍼탈에서 7,000명, 베저에서 9,000명, 마그데부르크에서 12,000명의 민간인을 공습을 가해 사망하게 만들었다.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1943년부터 미군과 영국군의 공습을 받았다. 베를린에 대한 공습은 1943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공습 초기 베를린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일 민간인은 대략 6,000명 정도로 알려졌으며, 1944년 3월 말까지 150만 명이 집을 잃었고, 도시 2,000에이커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연합군이 실행한 전략폭격은 독일 민간인의 피해를 더욱 극대화했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명, 함부르크에서는 적어도 5만 명, 베를린에서 5만 명, 쾰른에서 2만 명,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명, 뷔르츠부르크에서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총 60만 명이고, 부상자는 8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많게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제법 있다. 이러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투입된 연합군의 항공기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44년 한 해에 미 제8항공군이 잃은 폭격기 숫자만 최소 2,400대이며, 이런 저런 항공기 손실을 합치면, 대략 수만 대는 된다. 아무튼 이러한 공습이 민간인 피해를 늘린 것은 사실이며, 영국의 경우 과거 독일에게 당한 공습의 피해를 최소 10배 이상으로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존 키건, 류한수(역),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