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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소련의 친선을 강조하는 포스터)
북한 정부의 수립 과정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 형성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소련군이 ‘해방자’를 표방하며 직접 주둔했고, 소련의 영향력 아래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강화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압박을 받으며 결국 힘이 약화 되었다. 토지개혁 등 북한의 제반 개혁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막상 북한은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다. 국가 형성, 전쟁, 전후 경제 복구 등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북한은 점차 독자 노선을 표방하는 ‘주체’의 국가로 부상했다. 이 차이점은 어디에 연유하는가? 북한은 위성국가에서 자주국가로 뒤늦게 변모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자주적인 국가였는가? 이에 대하여 균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 소련의 동아시아와 북한에 대한 정책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간주하여 이곳에 소련군의 역향을 대부분 투여한 다음,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령정책을 실행하면서 소련에 충성하는 국가들을 세우는 데 깊이 개입했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가급적 미국 등 다른 연합국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의 국가이익을 보장받는다는 수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소련의 본래 동아시아 구상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의해 통일될 중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 일본 점령에의 동참, 한반도의 신탁통치 참여 등이었다. 하지만 그 구상은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 미국의 일본 단독점령, 한반도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광범한 반대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틀렸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의 공상화와 한반도의 분단정부 수립, 일본의 반공국가화는 소련의 애초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내부의 혁명 대 반혁명의 충돌과 이에 대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정책으로 인한 것이었다.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도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반제국주의 반봉건 국가 건설의 흐름 속에서 국가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소련은 국경을 같이하는 한반도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 이에 북한 지역을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적극적인 원조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있던 일본의 공장과 기업소를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버리고, 중요산업 국유화 조치를 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소유임을 확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들 시설의 재가동을 위해 적극적인 원조를 했으며, 더 나아가 북한 스스로의 군사력 강화, 엘리트 양성 등에 체계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949년에 중국혁명이 달성되자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맏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이 북한을 후원하게 했다. 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이후 중소분쟁이 발생하면서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 제3세계와의 관계 확장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북한 정부는 소련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수립되었으나, 그렇다고 초기 북한을 단순한 위성국가로 볼 수는 없다. 북한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자율성을 지녔으며, 소련은 북한의 든든한 후원국가였다. 북한 집권층은 소련을 비롯한 국제 공산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후 경제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외압에 대처하면서 1950년대 후반 시점에는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1945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북한의 대외관계는 상대적 자율성에서 절대적 자율성으로 자율성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출처: 북한의 역사 1 p.243~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