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상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환영 소련 련합군'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1주일 전 한반도 북부에서는 전투가 치러졌다. 전투는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에도 며칠간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진격 속도는 신속했다. 이들은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략전술을 선보였다. 이들이 바로 소련군(Soviet Red Army)이다. 독소전쟁 시기 히틀러에 맞서 4년간 전쟁을 치렀던 소련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소련군의 전술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시점에서 발전했으며, 1943년 쿠르스크 전투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붉은 군대는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룩했다. 소련군은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서 승리를 이룩했다. 히틀러의 자살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나자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이었다. 사실 소련은 1941년 당시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이 패전한 이후 소련은 일본군과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1극동전선군과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자바이칼전선군 등 크게 3방향에 병력을 극동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인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게 됐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 또한 일본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에 따라 8월 9일부터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하게 됐고, 그 속도도 매우 신속했다. 만주진격작전 당시 한반도로 진격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25군이었는데, 제25군은 소련 극동태평양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웅기와 나진, 청진 그리고 나남을 점령했다. 8월 13일 북한의 청진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극동태평양 함대의 지원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는데, 이 전투에는 이후 북한의 고위직을 보냈던 정상진도 그 현장에 있었다. 당시 정상진은 소련의 붉은 군대 소속으로 청진시에서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KBS에서 제작한 고려인 다큐에 나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후퇴해온 일본군들이 전부 청진시에 모인 거예요. 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걸 봤습니다. 그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도 우리 앞에 투항하는 그런 때까 있구나’ 느끼고 상당히 감동했습니다. 네가 유일한 조선 사람이니까 너에게 형무소 열쇠를 줄 테니 형무소 문을 열라고 했어요. 그래서 형무소 문을 여니까 나오면서 만세를 부르면서 울면서 소련군 만세를 부르고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참 너무나 감개무량했습니다.”
해방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 소련군 상륙 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했고, 8월 24일과 25일 소련의 공수부대들은 산업 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치스차코프 휘하 제25군의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개성에 도달했고, 38도선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진격하여 38도선 이북의 전 지역을 접수했다. 한반도 이북을 해방군으로써 해방시킨 소련군의 소식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던 이남 지역까지 당연히 퍼져나갔고, 서울에도 소련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일부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이 서울인근까지 잠시 들어왔다 나갔다는 자료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한반도 이남에 진주하게 된 주체는 바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했으며, 8월 26일 평양에 총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북한 지역의 6개 도, 85개 군, 7개 시(평양, 진남포, 청진, 함흥, 신의주, 해주, 원산)에 경무사령부를 각각 설치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기를 접수했으며, 행정기관, 경찰서, 법원은 물론 일본인 소유 대기업, 철도, 통신수단, 은행 등을 관리했다. 점령군을 표방했던 미군과는 달리 소련군은 자신들 스스로 해방군이라 표현했고, 군정 초기 조만식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자체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와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자체적으로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지주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했다. 따라서 한반도 이북 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처형과 처벌을 피해 월남했다.
(평양에서 시민들이 환영을 받으며 행진하는 소련군)
북한에서도 여러 진보적인 사회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1946년 3월 23일 ‘20개조 정강’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일본 통치의 잔재 청산, 언론 출판 집회 및 신앙의 자유 보장, 남녀평등 보장, 8시간 노동제, 의무교육제, 무상의료 그리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진보적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성과들이 나타났다. 8시간 노동제, 동일임금, 77일간의 출산 휴가와 소년노동의 금지 등과 같은 정책에서 당시 북한에서 실행된 사회주의 정책의 진보성이 드러난다.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5일부터 진행됐다. 토지개혁이 시행됨에 따라 총 100만 325정보 가운데 98만 1,390정보가 72만 4,522가구의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해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세기적 숙망을 가장 훌륭히 풀어주는 인민적인 법령이며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의 농민 문제, 농업 문제를 가장 철저히 해결하고 농촌경리의 장래 발전을 가장 순조롭게 보장할 수 있게 하는 혁명적인 법령”이라고 호평했다. 이런 토지개혁으로 농촌에서 지주층은 소멸했고, 소련 군정하에서 만들어진 농민동맹은 108만 3,985명이던 단원의 수가 개혁 후 144만 2,149명으로 증가했다. 토지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브루스 커밍스 또한 북한의 토지개혁이 소련이나 중국 베트남에 비해 유혈 없이 성공한 사례라고 주장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선포 당시 사진,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일부 지역에서 소련군의 폭력행위나 약탈 그리고 민간인 강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예전부터 조선의 이스라엘이라 불리던 신의주에서는 반공시위가 일어나 소련 군정이 진압한 사례가 존재하며, 당시 반공시위에 참여했던 한국의 민주화운동가 함석헌의 경우 이에 대해 증언한 바가 있다. 부녀자의 강간의 경우 초기에는 분명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중 일부는 월남하여 이승만이 참가하는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1946년 1월에 이르러 소련은 헌병을 들여와 군인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민간인들을 폭행하거나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소련군은 NKVD에 의해 총살됐다. 철저한 통제에 들어감에 따라 약탈 및 강간의 사례는 거의 보고가 되지 않았다. 소련 헌병들이 들어온 후 사태는 안정되었으며 그때부터 “소련 관리들의 행위는 항상 정확했으며” 사병들은 철저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소련군은 계속 보급물자를 징발했으나 대신 모든 것에 대해 보상받을 수 있는 영수증을 발행했다. 일각에서는 소련군이 많은 공장을 북한에서 반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몇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증거는 없다. 소련에 의한 만주 공업의 반출을 조사기록한 폴리 위원회(Pauley Commision)는 북한에서의 실제적 반출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미 정보당국은 수개월 동안은 소련에서 중대한 반출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1946년 6월에 이르면 그 이전의 보고가 후퇴하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에 근거했을지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거기다 소련 기술자들이 파괴된 공장들을 재건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1946년 중반에 이르러서는 생산이 1945년 수준을 능가하게 되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소련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준 해방군이었다는 사실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 안 좋은 사례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나, 대체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재건을 도왔으며, 소련 군정 기간 동안 북한 사회에서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한반도 북부 지역은 당시 미군정이 점령한 한반도 남부 지역보다 민중들이 더 많은 민주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의 성격은 해방군이었으며,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