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베르 호자의 사진, 상당히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리스와 코소보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맞닿아 있는 국가 알바니아(Albani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었다산악지대를 주로 이루고 있는 이 조그마한 산악 국가는 당시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농업국가였고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던 나라였다이는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동맹세력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5개월 전 알바니아를 침공했었다.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조그(Zog) 왕과 그의 정부는 도망쳤고체터스(Chetas)라고 불리는 일부 게릴라 부대들이 이탈리아군에 맞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당시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대략 5개 사단을 배치했다이로부터 대략 2년 동안 알바니아에 대한 정보는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역전되고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미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계획하기 시작하자알바니아인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9년 알바니아에 입성한 이탈리아군, 이탈리아군의 L3/35 탱크도 보인다.)

 

이 시점에서 알바니아의 주요 조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첫 번째로는 공공연하게 군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군장교 아바스 쿠피(Abas Kupi)의 지도하에 알바니아 북부 지방 일대에 있던 조그주의자(Zogist) 운동 그룹이다당연히 이들은 왕당파를 상징하는 세력이었다둘째는 알바니아 해안지대와 중부지방의 작은 언덕지대에서 활동하던 극우성향적 공화주의파인 발리 콤베타(Balli Kombetar) 즉 민족연합 운동 그룹이었다그리고 마지막은 이 글의 주인공인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공산주의 그룹과 그들이 이끄는 LNC(빨치산부대였다.

 

알바니아의 지도자로 알려진 엔베르 호자(Enver Hoxha)는 1908년 오스만 제국령 알바니아에서 태어났다부르주아 출신 집안에서 자란 호자는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은 역사학 교수였고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을 시점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유학생활을 바탕으로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었다고 한다이탈리아군에 맞선 파르티잔 투쟁을 벌였던 호자는 1942년 말 왕당파 그룹이었던 게헤그(Gheg)의 게릴라 부대를 설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또한 그리스 공산당(KKE)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하고도 협력하는 관계였었다.

(독일군에 맞설 당시 호자의 전투 지휘를 표현한 상상화)

 

당시 영국의 SOE는 이탈리아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호자와 협력관계를 형성한 게헤그의 부대와 호자의 파르티잔에 관심을 기울였다이들은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고자 했고, 2개의 타격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그러나 1943년부터 이탈리아가 항복할 기미를 보이게 되면서 새 정부 수립 부분에서 갈등이 나타났다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축출되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자이번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알바니아에 들어왔다독일군이 입성하면서 파르티잔 투쟁은 고난을 겪었다독일군은 대략 3개 사단을 동원하여 수많은 게릴라 부대들은 몰아냈는데작전 개시 2주도 안되어 수세에 몰렸다독일군은 알바니아 점령에 총 4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파르티잔 투쟁 당시를 표현한 엔베르 호자의 상상화)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알바니아에 대해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거기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30만이 넘는 추축군의 병사가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를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따라서 독일은 전쟁이 끝나면 알바니아 철수 후 그곳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독일군은 알바니아의 도시와 주요 도로들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고그 밖의 지역의 점령에는 소홀했다이에 따라 호자는 알바니아의 나머지 부분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 1943년 가을 호자는 그의 병력을 동원해 정적인 발리 부대를 공격했는데발리 부대는 여기서 독일군과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점령 초기부터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체터스는 독일군과 거의 싸우려 하지 않았다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알바니아에 침투했던 SOE의 여단장 트로츠키 데이비스(Trotsky Davies)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알바니아에서 활동했던 독일의 Waffen-SS, 이들은 결국 1944년에 알바니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깃발)

 

1944년 봄 영국의 SOE는 조그주의자(왕당파세력인 쿠피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지만당시 이 그룹은 친나치파 문제와 더불어 조직 내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이와 대조적으로 호자와 그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세력을 확장했고, 1944년 1월에 5천 명이었던 조직이 5월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이에 따라 연합국은 이들에게 군수품을 포함한 물자를 공중으로 지원했다호자의 빨치산 부대는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을 확장하고독일군 호송대와 나아가 수비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11월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호자의 빨치산 군인들)

 

그해 6월 독일군은 제1산악사단을 창설하여 북부의 연합군 교두보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여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쫓아내 버렸지만1산악사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자 다시 독일군에게 게릴라전을 감행했다이후 독일군은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알바니아에서도 후퇴하게 되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5개월 뒤인 1944년 11월에 호자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이로써 알바니아가 해방된 것이다빨치산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5천 명에서 6천 명 이상의 독일군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알바니아에서의 전쟁을 다룬 관련 서적)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알바니아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이에 따라 1946년 엔베르 호자를 지도자로 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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