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꽝남성 지도, 하미마을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에 있다.)
베트남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가다보면 호화로운 리조트와 골프 코스가 늘어서 있는 도로가 있다. 그 고속도로는 1A 고속도로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현장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냥 차를 타고 지나쳐 가는 곳이 되었지만, 1A 고속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지나다 보면 위령비 하나가 있다. 그 추모비가 바로 1968년 한국군이 저지른 하미마을 학살
(Ha My massacre)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다.
노란색 담장이 있는 뜰 안에 있는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는 사원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정사각형 뜰의 중앙에 높은 연단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위에 푸른 널빤지로 이은 2층 지붕을 열여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비각이 있다. 그리고 그 연단에는 1968년 학살 당시 죽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생이고, 가장 나이가 어린 희생자는 1968년생이다. 그들의 이름은 보 자인(Vo Danh)이라는 글자로 새겨져 있다. 도대체 이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주체는 누구일까?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은 바로 한국군이 저지른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 1968년 당시 하미마을에선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 총 30만 명 이상이 참전했고, 연 5만 명 이상의 한국군대가 남베트남에 주둔했었다. 이들은 주로 베트남의 휴양지인 다낭을 기점으로 배치되었고, 주로 꽝남과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 성에서 작전을 이어나갔다.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가 전투부대로써 남베트남에서 여러 작전들을 수행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들이 벌인 작전들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으로 전투지역을 설정해놓고,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로 설정한 곳에서 어떤 일을 벌여도 상관이 없었다. 즉 이 얘기는 자유사격지대에 있는 목표물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총으로 쏴죽이거나 수류탄으로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 연합군의 민간인 학살은 구조적으로 발생할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의 민간인 학살은 어떻게 보면 수색과 섬멸 작전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에 적힌 학살자 명단, 이 중에는 1살, 2살, 3,살, 4살, 5살의 이름도 적혀 있다.)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1965년부터 67년까지 대략 2년 동안 미군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1968년 구정에 있던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전황을 바꿔 놓았다. 1968년 1월 31일 구정 공세가 발발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유리해져갔다. 물론 전투에서야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을 버티기 힘들었지만, 반전여론이 강해짐에 따라 미국의 상황은 불리해졌다. 한편 구정 공세 이후의 전투는 보다 잔혹해진 양상을 보였다. 미군의 그 악명 높은 전쟁범죄인 피닉스 작전이 벌어진 것도 이때다.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쯔엉티투 할머니, 그는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다.)
한국군 또한 이 시기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1968년 2월 12일에 일어난 퐁니퐁넛 학살이 그러했다. 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한지 2주 뒤, 디엔반 현 디엔즈엉 사에서 한국군에 의해 발생했는데, 그게 바로 하미마을 학살(Ha My massacre)이었다. 1968년 2월 25일 새벽 청룡부대 2개 중대가 하미 촌의 따이 마을과 쯩 마을을 포위했다. 마을을 포위한 한국군은 오전 7시 쯤 대략 135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당한 135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에 태어난 88세 여성이고, 가장 어린 희생자 3명은 1968년에 태어났다. 그 외에도 학살당한 이들 연령대가 2살, 3살, 4살이다. 쉽게 말해 한국군은 하미마을에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에서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을 그대로 했다.
한국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2001년 당시 한국에 있는 베트남참전전우복지회가 “새로운 정서와 화해 그리고 신뢰 회복”을 목적으로 거대한 위령탑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면서 학살 사실에 대한 기록 삭제를 요구했었다. 물론 진실을 기록하기 원했던 주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바람대로 학살 기록은 그들이 겪은 대로 기록되었다.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팜티호아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다. 호이안 쪽에서 군대는 7시에서 8시 사이에 들어왔다.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군데로 모였다. 그런데 한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자식을 몸으로 감싸고 엎드렸다. 수류탄 하나가 등으로 날아왔으나 터지지 않았다. 그때 수류탄 하나가 더 날아와 다리가 잘렸다. 나는 죽은 척 엎어져 있었다. 밤이 되도록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나는 기어가 숨었다. 사람들이 나를 데려갔다. 그 당시에는 치료할 약도 없었다. 나는 그때 네 명의 가족을 잃었다. 자식 둘과 임신 4개월의 조카며느리를 잃었다. 이 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우리 며느리는 참 예뻤다. 저항을 했으나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우리가 살았던 집이 양민 학살터였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그 터에서 살기가 싫고 무서워 이 집으로 옮겼다. 그날 죽은 사람들의 수는 137명이다.”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2018년 퐁니퐁넛 학살 희생자이자 동명이인인 응우옌티탄과 함께 한국에 와서 한국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하미마을 학살 당시 11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 그리고 그 또한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와 남동생의 유해를 지금까지 찾지 못해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얘기도 남겼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어째서 한국군은, 한국 정부는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
(2018년 한국에 와서 사과를 요구했던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 남동생, 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
이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지도 53년이 지났다. 그러나 당시 피해자들의 마음속에는 53년 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지금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8년 기간 동안 한국군은 대략 5,000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이들은 군사기록상 4만 1,000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밝혀진 9,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쨌든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135명을 무차별 학살한 하미마을 학살 또한 그런 전쟁 중 하나다.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우리가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성해야할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참고문헌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엣 타인 응우옌(저), 부희령(역) 더봄, 2019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부, 책임없는 전쟁”」, 『뉴스타파』, 2016.05.27.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 『서울신문』, 208.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