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광장 입구에는 말을 타고 있는 한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 장군이 타고 있는 말은 나치깃발을 짓밟고 있고, 붉은광장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을 항상 맞이한다. 그가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1896년 12월 2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생 시절의 주코프는 성적이 우수했다. 그의 어머니는 주코프를 그이 외삼촌에게 보내 가죽 가공 기술을 배우게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시립 중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코프는 항상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지만, 군인의 길을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러시아 제국의 기병대에 입대했다. 두 달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두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특히나 훈련과정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인 그는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과정에 다시 들어갔고,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 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가 전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1917년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일으킨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볼셰비키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던 러시아의 군대를 불러들였는데, 주코프가 소속된 부대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코프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당에 입당한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공으로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적백내전이 일어난 이후 주코프는 과거 차르 정권을 복구하려는 백군 세력에 맞서 싸웠다. 당연히 그는 내전 시기에도 기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적군편에 서서 전투를 치렀고, 1919년 9월에는 왼쪽 다리와 옆구리에 수류탄을 맞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적백내전이 끝난 이후 주코프는 기병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등을 거쳐 부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에서 유명한 군사 지휘관으로써 거듭났다. 스탈린이 추진한 공업화에 따라 소련의 기병대가 탱크를 이용한 기계화 부대로 거듭나면서 주코프 또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보로실로프, 프룬제 등 소련의 육군 원수들은 주코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는 탁월한 지휘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스탈린의 대숙청도 피해갔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만주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수많은 탱크 부대를 앞세워 탁월한 전략전술로 일본군을 섬멸했다. 여기서 주코프의 탱크 부대와 격전을 벌였던 일본군 부대는 소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침략의 야욕을 동남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1941년 5월 소련군 참모총장이었던 주코프는 “소련이 먼저 독일군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의 걱정은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히틀러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1941년 9월 독일군의 포위로 시작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그는 히틀러가 그리고 점령하고 싶어했던 레닌그라드를 사수했다. 그가 이끈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면서 히틀러의 계획은 무산됐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주코프는 도시 방어의 책임자로서 모든 군사 활동을 지휘했고, 독일군 주력부대에 큰 타격을 주는 성과를 이룩했다. 결국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자 주코프는 최고사령관으로써 도시를 방어했다. 그는 독일 주력군을 스탈린그라드 밖에 묶어 둘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함으로써 독일군에게 25만 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는 쿠르스크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45년에는 벨라루스 제1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공방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주코프는 5월 8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주관했고, 소련의 대표로 문서에 서명했다. 즉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와 항복 선언식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에서 백마를 타며 장군으로서 큰 위엄을 보였다. 이후 주코프는 스탈린하고 사이가 크게 좋지 않았기에, 1950년대에는 원래의 직위보다 한참 낮은 우랄 지역의 사령관직으로 쫓겨났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국방 제1부부장이 됐다.
그러나 1957년 국방부장으로 일하던 주코프는 당시 흐루쇼프와 불가닌 그리고 몰로토프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면직됐고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자택에 머무르며 ‘쿠르스크’, ‘베를린으로 향하는 길’, ‘수도 방어 전투 중에서’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이러한 저서를 통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경험했던 기록을 후대에게 남겼다. 그러던 1974년 6월 18일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는 소련의 영웅으로서 크렘린궁 근처에 안장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전장에서 탁월한 공을 세워 레닌 훈장 6개, 10월 혁명 훈장 1개, 붉은 깃발 훈장 3개, 1급 수보로프 훈장 2개, ‘승리’ 최고훈장 2개 및 각종 상장뿐만 아니라 네 번에 걸쳐 ‘소련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주코프였기에 그는 러시아의 민족 영웅으로 이름을 남겼다. 여담으로 그는 미국산 코카콜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좋지 않게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아무튼 그는 현재 러시아사람에게도 영웅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