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기념하는 베트남측 포스터, 대다수의 북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73123일 북베트남의 외무장관인 레둑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파리평화조약(Paris Peace Accords)’을 맺었다. 이들이 맺은 파리평화조약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철수하는 것을 뜻했다.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트남에 있던 미군은 완벽히 철수하게 됐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에 포로로 잡혔던 미군들은 전부 다 석방됐고, 1973329일에는 마지막으로 몇 안되는 미군이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에는 20년 전 미국이 거부했던 제네바협정에 따라 대략 50명의 미군사고문단만이 베트남에 남았다. 즉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년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미군을 철수시킨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민족 영웅인 호치민(Ho Chi Minh)이 평생을 이루고 싶어 했던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어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정권을 경제 및 군사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412월 중순 수도 하노이에서 14명 이상의 노전사들이 팜구라오가 33번지의 한 건물에 모였다. 이들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반티엔둥 장군, 반티엔둥 장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로 1975년 호치민 캠페인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전설적인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은 남베트남 인민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해방투쟁에 차질이 없도록 조심하자고 당부했다. 북베트남군 총사령관인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장군은 최근의 군사 상황을 보고했고, 이 보고를 들은 참석자들은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가 남베트남의 푹롱(Phuoc Long) 성에 대규모 공세를 취할 것에 대해 거론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예비 점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남베트남 내부에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평화 조약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한달에 평균 1000명씩 전사했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무능함을 보였다.

(푹롱성 전투 지도, 푹롱성의 함락은 남베트남에게 있어서 1972년 부활절 공세 이후 처음 있는 성 함락이었다.)

  

197412월 중순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푹롱 성을 공격했다.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공격한 푹롱 성을 공격한 지 3주만인 197517일 성도 푹빈(Phuoc Binh)을 점령하면서 승리했다. 푹롱 성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미 국무부는 하노이가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했다.”라고 하며 비난했지만, 미국의 군사적인 개입은 전혀 없었다. 남베트남측이 성 하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1972년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베트남군의 푹롱 성 점령 이후 몇 주일 사이에 대략 15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을 통해 내려와 남베트남 국경지대에 주둔했고, 남베트남의 44개 성의 중심지 대부분은 베트콩이 장악한 상태였다. 또한 푹롱 성을 장악함으로써 북베트남군의 사령부는 남쪽 깊숙이 호치민루트 근처에 산재해 있던 30만 명의 병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지도, 중부고원지대 닥락 성에 있는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핵심 거점이었다. 부온마투옷의 함락은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병력을 모은 북베트남군은 19753월 남베트남군의 거점인 부온마투옷(Ban Me Thuot)를 점령하고자 했다.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이 함락되면 남베트남군의 전반적인 방어선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대략 3만 명 이상의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에서 몇 마일 외곽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1975310일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는 부온마투옷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북베트남군의 대포와 로켓포가 공격을 가하자 남베트남군 23사단 본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북베트남군은 비행장을 점령했다. 북베트남군이 공격하자 포위당한 남베트남군은 포위당한 지 30여 시간 만에 항복했고, 공격 시작 5일 만인 315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을 완벽히 장악했다.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인 부온마투옷이 공격 5일 만에 함락되자, 북베트남군은 중부 해안 지역의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부온마투옷을 향한 공격이 시작된 지 5일 만에 중부 고원 지대를 포기한다고 통보했다. 이런 통보가 있은 지 2일 후 남베트남 정규군은 명령에 따라 플레이쿠와 콘툼을 버리고 후퇴했다. 이렇게 되자 북베트남군은 전투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197532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공격했다. 이들은 옛 황궁의 보존된 도시인 후에를 포위했고, 325일 후에를 점령했다.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이 28일간 후에를 점령했던 이후 6년 만에 다시 점령한 것이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당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군 전차)

 

반 티엔 둥 장군은 10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다낭에 3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다낭에는 피난민들이 몰렸는데, 미 국무부는 민간 비행기를 이용해서 10만 명의 남베트남군과 피난 가는 민간인들을 인솔했다. 후에가 함락된 이후 남베트남군 사령관은 도주해 버렸고, 나머지 장교들도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1975330일 다낭도 후에처럼 함락되었고, 다낭을 지키고 있던 10만 명의 남베트남군 병사들 대부분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

 

19754월이 되었을 무렵 남베트남 국토의 절반은 북베트남에 점령당했고, 남베트남 병력 15만 명은 전투부대의 기능을 상실했다.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한 지 1달도 안 되어 남베트남의 절반을 차지한 북베트남측은 호치민의 생일인 519일까지 수도 사이공에 입성할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4월 첫째 주에 접어들자 해안 거점들이 하루에 하나씩 함락됐다. 처음에는 퀴논(Qui Nhon)이었고, 다음에는 투이호아(Tuy Hoa) 그 다음날에는 나짱(Nha Trang)을 북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북베트남군의 진격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남베트남군은 중부고원지대의 끝자락 중심에 있는 쑤언록(Xuan Loc)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쑤언록 전투, 쑤언록은 베트남 통일 전쟁에 있어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이다.)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레민다오 장군, 남베트남의 레민다오 장군은 쑤언록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은 무너졌다.)

 

197549일 반 티엔 둥 장군 휘하의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마지막 거점지라고 할 수 있는 쑤언록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4만 명의 북베트남군 병력이 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쑤언록을 지키고 있던 남베트남군의 제18사단장 레민다오(Le Minh Dao) 준장은 전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북베트남군은 쑤언록을 단기간에 함락시킬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421일까지 계속됐다. 쑤언록이 함락된 이후 북베트남군의 총 공세가 시작된 지 44일 만인 23일에는 남베트남 측 44개성이 완전히 함락되거나 포위됐다. 즉 수도 사이공만이 남았던 것이다

(후퇴하며 남베트남군이 버리고 간 군복과 군화들)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 당시의 남베트남 지도, 부패하고 무능했던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서 상대가 안됐다.)

 

1975421일 남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응우옌반티에우는 몰래 떠났다. 과거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모은 금괴 2톤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26일에는 1963년 응오딘지엠을 축출했던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정권을 이어받게 됐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군은 425일 사이공 근처 30마일에 펼쳐진 방어선을 휩쓸었고, 남베트남에 있던 각국의 대사관들도 하나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각 방면에서 포위를 좁혀가며 수도 사이공을 압박했다. 이렇게 사이공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미국은 소위 속풍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전개하여 남아 있던 미국인들을 헬리콥터에 태우고 도망쳤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떠나는 미국측의 헬리콥터)

 

1975430일 오전 75311명의 미국 해병대원이 마지막 미군으로서 대사관의 성조기를 가지고 베트남을 떠났다. 반 티엔 둥 장군의 병력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입성했다. 사이공에 입성한 북베트남군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사이공 시민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거리를 행진했다. 오전 11시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Type 59 tank)’ 한 대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들어섰다. 여기서 병사 1명이 발코니로 뛰어올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게양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서방 언론에 의해 생중계됐다. 이날 대통령궁에 있던 두옹 반 민 장군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렇게 해서 10000일간 지속되던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은 혁명 군대와 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고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이유 중 하나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에 따른 동남아시아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도미노 이론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이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1963년 응오딘지엠 정권이 내부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이처럼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는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를 막으려고 1964년에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었기에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첫번째 탱크를 따라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측 탱크들)

 

이는 현재의 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학계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일반적인 평가다. 이를 보여주듯이 남베트남 정권은 미군이 철수한지 2년 만에 붕괴됐고, 북베트남군이 전면적인 총공세를 가한지 1~2달도 안되어 방어선이 붕괴됐다. 1972년 북베트남군이 소위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을 때도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붕괴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었지만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이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미군의 항공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절대로 남베트남군이 잘 싸워서가 아니다. 거기다 남베트남 정권과 군대의 핵심인사들은 변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프랑스 식민지 시기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인물들이었다. 남베트남군 장교나 사령관들 대다수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들이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언론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리영희는 남베트남 정권과 북베트남 정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75년 5월 7일에 열린 베트남 전쟁 승전 기념 퍼레이드, 통일을 이룬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기억한 인물은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었다.)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 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콩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 운동가, 간호사, 각급 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단 한 사람도 식민지 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 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출처 : 대화 p.349~350

 

따라서 북베트남 측이 승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베트남이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크고 참혹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에 헌신했던 호치민은 1969년 투사로서의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호치민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그가 사망한 지 6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는 결코 패망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계승한 미국과 싸워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Ten Thousand Day War in Vietnam 1945~1975)’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책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책 마지막 장에 쓴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베트남 해방 승리 기념 포스터)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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