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 동유럽과 서유럽)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에 맞서 인민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19세기부터 전 세계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쇠락을 의미했고,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급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미국은 자본가들의 기업과 이윤축적이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 국가였던 반면, 소련은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공공분야에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45년간의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서로가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문화적으로 경쟁했다.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역사 학계에선 미국의 개입보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과 노골적인 폭력이 더 많았다고 주장하고, 그 사례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러할까?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은 1946년 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했던 한 연설이었다. 처칠은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같은 윈스턴 처칠의 발언이 증명하듯이, 미국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시작으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 특히나 1945년 루스벨트 사망 후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발언이 있은 지, 1년 뒤인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한다.

(트루먼과 스탈린)

 

트루먼 독트린의 내용은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렇게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이에 소련 또한 반발하게 되자,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체제로 거듭났다. 미국은 소련을 단지 경쟁자가 아닌 직접적인 위협으로 제시했지만, 그러나 이 냉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과 개입을 행사했던 것은 스탈린(Stalin)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우익 군주독재국가였던 그리스는 나치가 물러난 직후 영국이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좌익 민족해방전선을 제제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리스에선 좌익 게릴라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리스 좌익은 대략 25만 이상이나 되는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사태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그리스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영국은 미국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트루먼 독트린’에 의거하여 그리스의 우익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아테네 우익 정부에게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만 4000톤에 달하는 군사장비를 보내줬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미군사고문단을 전투현장에 보내 1949년 그리스 좌익을 붕괴시키고 우익독재 정부를 세웠다.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수송하는 미항공기)

 

미국의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불안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다. 특히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서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서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1948년 이탈리아가 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것 같자 미국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만일을 대비해 과거의 파시스트들을 끌어모아 무장 지하 조직인 글라디오(Gladio)를 건설했으며,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을 계획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철수하자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선 다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에 조지 C. 마셜 장군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화해 및 중재를 시도했었지만,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내전이 시작되자, 태도가 급변했다. 중국 민중은 부패한 관료집단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선택하기보단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싸웠는데,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이어졌다. 미국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을 실시한 이래로, 한반도 이남의 자주적인 조직과 단체들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에따라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들이 통일 운동과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방해함에 따라,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인 결정권은 무시됐다. 이렇게 해서 미군의 탄압으로 대구와 제주도 여수순천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 통일 당시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도 개입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 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 해방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써 접근했고, 프랑스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1950년 초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000만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신 감당했지만,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이러한 전쟁 비용은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에 이르렀다. 미국은 필리핀 문제에도 개입했었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인 총선으로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가 미국에 의존된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아르벤스의 반대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었다. 1951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와 미국 관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경우는 이보다 확장력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소련이 자신들의 체제를 전파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였는데, 이들의 경우는 스탈린의 조언에 거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당시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안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 군대가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냉전 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형성한 사회주의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붉은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 국한됐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미국의 반공정책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조처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미국은 소련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개입과 간섭을 했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논리가 절대로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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