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 최초의 신화 속으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했던 프랑스의 지식인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다.

 

- 과거의 이 세상 모든 것은 미개한 민족은 별도로 치고, 거의 몇 권의 책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상을 지배해왔다는 몇 권의 책을 지배해온 책을 발견했다. 적어도 몇 권의 책에 당연히 포함되었을 구약성서 창세기와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양대 산맥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바로 그 책 말이다. 동진(東晉)의 갈홍(葛洪)이 지었다는 포박자(抱朴子)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가. 검은 구름을 열고 햇빛이 나타나면 만물은 그 모양을 감출 수가 없고, 서적을 펴놓고서 고금을 생각하면 천지도 그 진상을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을. 신화를 낳은 신화,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저자는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길고 고된 작업을 마치고 대한민국 출판사에 길이 빛날 커다란 획을 그어낸 것이다. 드디어 최초의 신화의 진상이 대한민국 천하에 공개되었다.

 

명쾌하고 유쾌하고 통쾌하다.

 

 

 

 

2. 깨어진 진실

 

 

지금껏 내가 믿고 의지해왔던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린 시절부터 지구이외에는 물이 없고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육받아 왔던 일이 뒤집어졌다. 갈릴레이에게 고독한 인생길을 강요했고,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혈안이었던 로마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인정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성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던 아이에게 거인처럼 위대해 보였던 신부님의 성경말씀이 수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고, 학창시절에는 그리스 신화가 최고라며 유식을 신나게 뽐내던 선생님의 목청은 여전히 살아있듯 그대로 귓전에 맴돌고 있다. 성장하면서 배운 것들 중에 가장 소중하고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사회로 발을 내디뎠고,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들에게 배운 대로 가르쳤고, 동시에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 앞에 수메르 신화와 길가메쉬 서사시가 나타났으니.

 

유대인 율법학자들의 탈무드는 말하고 있다.

 

- 책은 만인의 공유물이며, 만인은 배움의 의무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동양의 해 뜨는 나라에서, 벌써 물 건너 서양에서는 150년이 훌쩍 넘도록 파헤쳐졌고, 세상을 지배해온 몇 권을 지배했던 책으로 성경이 탄생하기 전부터 군림했었고, 고대 그리스 지성인들이 알고자 갈구해왔던 진정한 만인의 공유물이 어째서 이제야 우리 손에 들려진단 말인가.

 

최후의 것을 최초의 것으로 확실히 믿고 살아왔다. 안중근 의사의 말처럼 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심정으로 책읽기를 하려고 애써왔고,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충고를 따라 남아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항상 머릿속에 그려왔다.

 

 

3. 1부를 읽다

 

 

바벨탑의 진실이라니! 성경공부를 하면서 진짜 궁금했던 항목이다. 그리고 한 번도 속 시원한 답을 들어본 적 없다. 야붸 신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히브리족의 신이 존재하기 전에 수메르의 신 엔릴이 있었고 엔키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엔릴 신에게 유일한 언어 수메르어로 말했는데 사람들의 입에서 말을 바꾸어놓은 신은 엔키 신이었다. 그곳에 야붸는 존재하지 않았다.

 

1872123일 영국 수상 글래드스톤을 비롯한 많은 청중들 앞에서 사건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지 스미스가 성경보다 더 오래된 대홍수 문서를 읽어낸 것이다.

 

- 나는 뜻밖에 갖게 되는 1분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언제나 작은 책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말을 남길 정도로 정열적인 독서광이었던 글래드스톤 수상도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신화의 배꼽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미스의 논문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 이곳은 문명의 요람이며 예술과 과학의 산실입니다만 2000년 동안 폐허로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고대 기록을 포함한 그곳 문학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앗씨리아인들이 베낀 문헌들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흙무더기와 폐허가 된 도시들 아래에서, 더 오래된 대홍수 문서들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전설과 역사가 누워, 시방 탐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저자의 배려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연대기라는 항목으로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의 웅변이 들린다.

 

- 히브리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 앞서 악카드어로 기록된 원본들이 있었다! 악카드어로 기록되기 전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진짜 원본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4000여 년 전 수메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로부터 다시 부활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혜인 셈이다.

 

 

4. 2부를 읽다

 

 

인간에게 인생이라는 여행의 끝은 죽음이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왕도, 사제도, 갑부도, 우리가 홀딱 빠져 우상화해두었던 그 어떤 스타도, 한 마디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죽음에 대해 가장 몸서리치게 써내려갔던 최초의 책이 여기에 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신화다. 인간이 신화의 중심에 서 있는 주연이고, 신들은 조연이다. 영생하는 신들은 우리들의 영웅이며 필멸자(必滅者)인 길가메쉬를 보조하는 역할로 일관한다. 서사시는 오디세이아에서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를 묘사하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게 시작한다.

 

- 말씀해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그 사나이에 대하여, 임기능변에 능한 이곳저곳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그에 대하여...... 그가 보았던 도시의 사람들도 무척 많았고 그 마음가짐을 알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깊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전우들의 귀향을 구하려다가...... (오디세이아)

 

- 광활한 땅 위에 있는 모든 지혜의 정수(精髓)를 본 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므로, 모든 것에 능통했던 자가 있었다. 지혜는 망토처럼 그에게 붙어 다녔기에, 그의 삶은 지극히 조화로웠다...... 성벽에 올라, 우루크로 들어가서, 거닐어 보라, 진정, 그곳을 거닐어 보라...... 세상 최고의 남아였다. 그는 세상 모든 곳을 둘러보았으나, 우루크성()으로 돌아왔다. (길가메쉬 서사시)

 

지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루크 왕이 있었다. 4800년 전 일이다. 이야기는 현존(現存)하는 우루크 성벽에 대한 묘사로 최초의 신화가 갖는 묘한 역사성을 엿보게 한다. 우리가 처음 대면하게 되는 젊은 길가메쉬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도시의 젊은이나 새신부들을 괴롭히는 폭군이다. 시민들의 간청과 신들의 요구로 여신 아루루는 길가메쉬와 대적할 만한 엔키두를 창조한다. 그는 자연 상태의 사람으로 야생생활을 하고 있다. 이야기꾼은 이 대목에서 사냥꾼과 여자를 등장시키고, 원시인 엔키두는 문명인으로 탈바꿈한다. 이 때 여자가 사용한 무기는 수간(獸姦)이 아닌 인간답고 정상적인 섹스였고, 빵이었고, 맥주였고, 옷이었다. 인간답고 정상적인 섹스는 동물 수준에서 벗어난 인간이 직립으로 보행하는 점과 연관된다. 인류 최초의 술은 노아의 포도주가 아니라 오히려 엔키두의 맥주(수메르어로는 카쉬-여기를 읽을 때 한국산 맥주 카스가 생각났다)라고 하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메르는 맥주의 천국이었다.

 

이브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을 유혹했다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런 다음 둘이 지혜로워졌다는 대목도. 엔키두에게 정상적인 성()을 가르쳐 준 여자는 이런 말을 한다.

 

- 당신은 지혜로워졌어요, 엔키두. 이제 당신은 신처럼 되었어요.

 

그리고 히브리 신화 베레쉬트에서 야붸 신은 이런 말을 했다.

 

- 보아라.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우리들 중 하나처럼 되고 말았다.

 

개화된 미개인은 마음이 편안해져서 노래를 불렀다! 기운이 솟았고 얼굴이 빛나서 문명인이 된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얏호! 우랄랄라!

 

여자의 안내로 우루크로 들어온 엔키두와 길가메쉬가 격돌한다. 그렇지만 둘은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면서 왕의 소란은 잠잠해진다. 우루크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길가메쉬는 여전히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그는 악()의 상징이며 삼목산의 산지기 훔바바를 죽이고 삼목을 베어올 계획을 꾸민다. 산에 산 적이 있었기에 훔바바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엔키두는 형의 만용에 반대하고 도시의 장인들도 말린다. 하지만 장자들의 허락은 떨어지고 엔키두도 따라 나선다. 둘은 그렇게 철없는 청년들이다.

 

훔바바와 벌인 싸움은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길가메쉬는 기겁한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는 다름 아닌 태양의 신 우투(샤마쉬라고도 함)였다. 우투가 일으킨 열세 종류의 바람으로 훔바바는 힘을 잃는다. 길가메쉬는 훔바바가 살려달라는 애원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엔키두가 강력하게 반대하니 왕은 결국 훔바바의 목을 내리친다. 저자가 주는 정보에 의하면 훔바바는 엘람의 신 훔반이었다고 한다. 훔바바는 신들의 제왕 엔릴 신이 산신으로 임명할 정도로 총애하던 신으로 수메르어로는 후와와라고 한다.

 

훔바바의 죽음에 대한 가장 완전한 설명은 저자가 제공한 악카드판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수메르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악카드판의 필경사가 수메르판을 참고했다는 것은 1부에서 저자가 친절하게 제공한 길가메쉬 서사시 연대기를 보면 쉽게 알만한 일이다. 후와와가 죽게 된 경위는 사실 우투가 제공한 바람이었다기보다는 길가메쉬가 자신의 누이들을 후와와에게 팔아먹으면서 산신의 후광과 바꿔치기한 결과였다.

 

- 영웅이 ……속이는 행동을 하다니!

 

왕은 보통의 영웅처럼 맞대결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인(成人)도 아니었고 철없는 젊은이였을 뿐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건 바람의 신이며 신들의 2위 서열에 올라있는 엔릴의 호통이었다.

 

왕은 유치한 승리자가 되어 우루크로 돌아온다. 그는 싸움과 여행의 먼지를 씻어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마치 오디세우스가 파도의 시련을 극복해내자 아테네가 신의 아름다움을 주었듯이 아무리 자존심 강한 여신이나 여성도 녹아내릴 만한 옷을 걸친 것이다. 이렇게 차려입은 길가메쉬는 무척 매력적이어서 여신 이쉬타르가 그에게 푹 빠져 청혼을 한다. 그렇지만 여신은 왕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다. 그녀의 연애 전력을 보면 남자와 남신들을 우려먹고 차버린 일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 죽음을 모르는 여신과 함께 누운 자는 그런 짓을 한 후로는 생식 능력을 상실할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이 말을 듣고 병들어 누웠다는, 호메로스의 송가에 나오는 이다 산의 양치기 소년 안키세스처럼 이쉬타르에게 당한 가련한 남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아프로디테나 비너스의 원형은 이쉬타르며, 이쉬타르의 원형은 바로 인안나였다! 길가메쉬에게 심하게 경멸당한 여신은 이를 갈며 하늘로 올라가 천상의 황제인 아누 신에게 하늘의 황소를 달라고 조른다. 이쉬타르는 거대한 하늘의 황소를 이끌고 우루크로 침입하지만 엔키두의 재치와 두 거인의 단합에 패하고 만다. 그들이 황소를 죽이는 기술은 크레타의 황소를 죽이는 곡예와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하늘의 황소는 후와와처럼 처참하고 죽고, 여신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노한다.

 

궁전에서 축전이 열리고 길가메쉬의 당당한 음성이 들린다.

 

- 가장 용감한 남자는 누구인가? 가장 대담한 사내는 누구인가? 길가메쉬가 남자들 중 가장 용감하고, 사내들 중 가장 대담하다!

 

이 지점에서 둘은 힘과 명성에 있어 최고점에 서 있다. 후와와와 하늘의 황소를 죽였고 아누도 어쩌지 못했던 성깔 사나운 여신을 경멸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들은 그 무엇도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키쉬의 왕 아가와의 전쟁도 둘의 승리로 끝난다. 엔키두 역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아가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점토채굴지에서 양질의 흙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흙이란 것이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물질이었던 모양이다. 흙은 하늘이 갖고 있는 다섯 요소, 말하자면 나무, , , , 물중에서 가장 거룩한 보호자며, 나머지 네 가지 요소에 양분을 주는 자연적 원천이었다.

 

불행하게도 이제부터 신들의 저주가 시작된다. 둘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로 엔키두가 죽음을 맞이한다. 신들은 길가메쉬는 살려두고 엔키두를 먼저 죽인다. 단순하면서도 용감무쌍했던, 그러나 때로는 지혜로웠던 엔키두는 그렇게 죽어간다. 저자는 상투적인 화법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우드 레아 우드 수-라 레아, 인류의 가장 시원적인 관용구로 시작되는 수메르어판을 소개한다. 그가 길가메쉬와 엔키두의 저승 여행으로 제목을 붙인 이 문서를 보면 엔키두의 영혼이 묘사하는 지하세계는 틀림없는 비애의 장소다.

 

죽음을 단지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길가메쉬는 절망에 몸부림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는다. 자신이 부렸던 만용은 오간데 없고 엔키두를 따라 자신도 죽을 거라는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떤다.

 

-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 속을 파고드는 구나! 죽음이 두렵다.

 

왕은 세상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영생을 얻은 유일한 사람이며 자신의 조상이기도 한 우트나피쉬팀의 구역을 찾아 나선다. 결국 예서부터 새로운 추구가 시작된다. 명성을 통한 불멸이 아닌 육신의 불멸을 찾는 것이다. 길가메쉬는 땅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며 하늘의 지혜를 찾아 나선다. 오디세우스가 테이레시아스를 찾아 길을 떠나듯. 이것은 몽상적이기도 모험적인 영혼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그리고 거기로 가는 길에는 단테의 바로 그 암흑의 숲이나 산, 함정 같은 상징적이고도 원시적인 것들로 장치되어 있다.

 

여행자이자 방랑자로 변한 길가메쉬는 전갈 부부의 도움으로 신산에 들어선다.

 

- 산 입구는 이제 당신에게 열려 있소!

 

그는 연속적으로 이어진 암흑을 뚫고 화려하게 치장된 정원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유혹을 부리치고 여행은 계속된다. 세상을 배회하던 길가메쉬는 어느덧 바다 끄트머리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주막같은 여인숙이 있고 씨두리라는 여신이 여행자와 마주친다. 여신은 길가메쉬에게 삶의 쾌락에 대해, 신들과는 다른 인간의 길에 대해 늘어놓는다.

 

-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말이에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방랑자는 여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행자의 목적지는 오로지 한 곳! 그는 지칠 만도 하지만 영생에 대한 갈증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생명을 추구하는 모티브는 그림(Grimm)<동화집>에 들어있는, 죽어 가는 왕과 그를 되살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찾아 나서는 그의 세 아들을 생각나게 한다. 씨두리가 준 정보를 통해 알게 된 뱃사공은 우르샤나비. 길가메쉬는 그의 도움을 얻고 죽음의 바다를 건넌다. 그리고 마침내 우트나피쉬팀의 땅으로 들어간다. 멀리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영생자가 놀란다.

 

- 아니, 저자는 대체 누구야?

 

한때는 죽음을 기만하는 만용으로 사로잡혀 후와와와 하늘의 황소를 죽이는 죄를 짓기도 했으나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모든 걸 버린 여행자는 이렇게 유일한 영생자를 만난다. 우트나피쉬팀은 거기 딜문에 살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의 영웅이며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가 세상의 끝에 있는 엘리시안 평야로 보내져 딜문처럼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곳에서 붉은 머리의 라다만토스와 살게 된 것과 상통한다. 영생자의 딜문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의 시에 나오는 봄꽃들이 만발한 부드러운 들판과 엘리시안 평야 그리고 축복의 섬들이 있는 곳과도 같은 곳이다. 도덕경(道德經) 80장은 이른바 유토피아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아내고 있다.

 

- 나라는 크지 않고 백성이 많지 않는 게 좋다. 군주는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흉기를 피하고, 멀리 떠돌지 않고 저들의 집을 아끼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배와 수레들이 있다 해도 타고 다닐 필요가 없고, 무기와 흉기가 있다 해도 쓸모가 없어진다. 군주는 또 문자 대신 새끼줄을 꼬는 순진무구함의 경지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알맞은 옷을 생각하고, 집을 안락하게 여기고, 저들의 풍습을 누린다. 나라들은 서로 이웃하고, 개 짓는 소리나 수탉이 우는 소리가 마주 들리기는 하지만, 백성들은 이웃 나라를 방문하기 위해 먼 길을 갈 필요도 없이 저들의 영생을 누린다.(獨立篇)

 

저자는 우리에게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점토판의 사진과 함께 거기에 실린 수메르의 완벽한 지상천국 딜문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해 준다.

 

- 까마귀가 깍깍 울지 않았고, 닭이 구구 울지 않았고, 사자가 굶주려 잡아먹지 않았고, 늑대가 양을 덮치지 않았고, 개가 어린 염소의 목을 따지 않았고, 돼지가 보리를 먹는 일조차 없었다. 홀로 된 여인이 지붕에 맥아(麥芽)를 얹어놓았으나 새들이 탐내 먹는 일도 없었고, 비둘기가 날개 밑으로 머리를 묻지 않았다. 눈병 있는 자가 눈이 아파라고 하지 않았고, 두통 있는 자가 머리가 아파라고 하지 않았고, 늙은 여자가 나는 할미다라고 하지 않았고, 늙은 남자가 나는 할아비다라고 하지 않았다. 처녀가 몸을 씻지 않아도 도시에서 내돌림 당하지 않았고, 강을 건너는 자가 힘들어라고 하지 않았고, 전령이 급보를 알리려고 도시 주변을 뛰어다니지 않았고, 노래하는 자가 일하러 갑시다라고 부르지 않았고, 도시 변두리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바로 그런 이유로 제가 멀리 있는 자라고 불리는 우트나피쉬팀 당신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행에 지친 방랑자의 말을 듣고 난 딜문의 영생자는 자신이 불멸하는 특혜를 입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들려준다. 대홍수와 인간의 절멸! 그리고 인간의 창조주 엔키 신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나게 된 경위 등을 세세하게 말한다. 그가 신의 지시에 따라 배를 만들고, 짐승들을 배에 싣고, 홍수가 땅의 생명들을 절멸시키고, 홍수가 끝날 즈음 배가 산에 멈추고, 생존자가 새를 날려 보내 시험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들이 내려와 제삿밥을 먹는 것까지, 어쩌면 그렇게 구약성서에서 본 것처럼 동일한 순서로 사건은 진행된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길가메쉬는 7일 동안의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영생은 아득히 멀어져만 간다. 우트나피쉬팀 부부는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는 식물을 선사한다. 그는 바레인의 진주잡이 잠수부처럼 자신의 다리에 돌을 묶어서 물 아래로 내려가 불로초는 얻는다. 그러나 생명의 식물은 뱀이 갈취한다. 순간 늙은이가 젊은이로 될 수 있다는 환상은 영구히 상실된다.

 

- , 뱃사공이여! 말 좀 해주오! 누구를 위해 내 손이 그토록 고생했단 말이오. 우르샤나비! 누굴 위해 내 심장의 피를 다 쏟아 부었단 말이오! 나는 정말이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땅의 명물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었소! 이제 높은 파도가 그것을 20리그나 멀리 떠내려 보낼 것이오! 나는 압수의 통로를 열었을 때, 장비들을 모두 버렸소. 내가 어떻게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겠소! 돌아가서 배를 해안가에 놓고 가겠소!

 

젊은이가 추구한 것은 생명에 대한 갈구라기보다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처럼 느껴진다. 체념한 길가메쉬는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왕이 최후로 패배에 직면하는 장면은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느끼게 한다. 공포나 절망에 떨었던 그였다. 그 대신 일종의 평정심이 느껴진다. 값진 경험을 한 뒤에 얻은 체념이라고나 할까. 현실에 대한 인정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왕은 동행한 우르샤나비에게 새삼스럽게도 차분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우르샤나비, 성벽에 올라 우루크로 들어가서 거닐어보오. 진정 그곳을 거닐어보오. 토대를 살펴보고 석공술을 눈여겨보시오. 가마로 구워낸 벽돌이 아니던가요?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요? 일곱 현인들이 그 기초를 세웠소이다.

 

영웅 심리에 가득 차서 부렸던 불멸을 향한 호기보다 죽음을 넘어서려는 육체적인 불멸을 향한 두 번째 도전은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유한한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도전한 길가메쉬는 군소리 못할 정도로 비참하게 KO패 당한다. 자신의 유약과 경솔, 불명예스럽게도 저지른 엄청난 실수, 그리고 초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던 진실 앞에 그는 스스로를 조소했을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완전한 체념으로 냉정을 찾은 젊은이는 이제 성인이 된다. 배리(JM. Barrie)의 피터팬(Peter Pan)처럼 항상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던 길가메쉬는 비로소 미성숙의 터널을 통과한 것이다.

 

장자는 이런 말이 생각난다.

 

- 사람이 절대적인 평온을 얻으면 하늘의 광휘를 발한다. 이 하늘의 광휘를 발하는 사람은 본연의 참다운 자기를 본다. 참다운 자기를 배양하는 사람은 절대를 얻는다.

 

본연의 참다운 자기!

모험은 끝났고 이제 우루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끝으로 저자가 우리에게 준 특혜의 하나인 수메르어판을 읽어본다. 야생 황소 길가메쉬는 죽는다. 야생 황소, 이 단어를 볼 때마다 크리스티앙 자크가 쓴 소설로 3300년 전의 이집트 영웅이었던 <람세스>가 자꾸만 떠올랐다.

 

- 네 할아버지께서 내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다. '그 어떤 적도 널 정복할 수 없도록, 영원한 젊음과 단단한 가슴, 그리고 날카로운 뿔을 가진 힘센 황소가 되어라.' 람세스, 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 넌 진짜 황소 같았다. 이제 백성의 행복을 위해 빛을 발하는 태양이 되어야 한다.

 

야생 황소 길가메쉬는 끝내 죽고 만다. 그리고 신의 음성이 들린다.

 

- 그렇다하여 슬퍼해서도, 절망해서도,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너는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고난의 길임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너는 이것이 너의 탯줄이 잘려진 순간부터 품고 있었던 일임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날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인간의 가장 고독한 장소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멈추지 않는 밀물의 파도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로 인한 작은 접전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 된다.

 

길가메쉬의 아버지는 우루크왕 루갈반다였고, 그의 어머니는 들소의 여신 닌순이었다. 영웅은 3분의 2는 신이었고, 3분의 1은 인간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프티아왕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었지만 일설에 의하면 아폴론에게 그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맞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신의 유전자를 일부나마 갖고 있는 존재라고해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영웅이 영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죽음이 정말 두렵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슬픔도 놓고 절망도 놓고 의기소침도 깨끗이 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인생을 살면서 느꼈던 분노와 집착을 벗어버리고 저승에 갈 수 있을까?

 

가장 어두운 날이 다가서고 있다. 가장 고독한 장소가 기다리고 있다! 멈추지 않는 밀물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하지? 난 정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5. 3부를 읽다

 

 

독일 시인 릴케도 길가메쉬 서사시에게 홀딱 빠졌었다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서사시의 내용을 반복하며 길가메쉬는 굉장하다!’라고 했다고? 그것도 1916년에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2020.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수메르 신화에 대해 무지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기록으로 본다면 길가메쉬는 최초로 초야권(初夜權)을 휘두른 폭군이다. 저자는 길가메쉬의 초야권은 절대로 신성하지 않다며, 그는 아직 사랑다운 사랑을 모르는 젊은이일 뿐이라며, 성욕을 채우기 위해 쉴 새 없이 밤낮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청년일 뿐이라며 감상문을 써나간다. 그러면서 여자와 여신의 역할에 대해 거의 여성찬미주의자처럼 풀어낸다.

 

- 현실에로의 안주. 여신이 권하는 삶은 어머니가 바라는 삶이오, 누이가 내미는 삶이오, 아내가 원하는 삶이오, 딸이 갖고 싶은 삶이다. 그것은 필멸의 인간에게는 진실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이런 식으로도 말한다.

 

- 여자를 정복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짓이다. 차라리 그들에게 정복당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안전한 길이다. 열등한 존재가 우등한 존재를 넘어서는 일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는 톨스토이가 한 말을 꺼낸다.

 

-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리 연구를 계속해도 항상 새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여자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 여자, 이 살아있는 신화의 보따리를 풀고자한다면 그들을 더욱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이 땅의 천국과 지옥은 그들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이 글을 읽어보면 어쩌면 바로 이거야!”라며, “아이, 좋아라!” 하겠지만 저자의 의도는 정작 다른 곳에 있어 보인다. 나에게는 그가 태초에 남자보다 먼저 지혜를 알았던 여성에 대한 예의로부터 시작해서 철저한 남녀평등주의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남녀가 진실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아름다운 사고의 발산이 아닐 런지.

 

이런 생각에 잠시 미소를 지으며 빠져 있다가 재차 죽음이라는 타이틀이 걸린 그의 감상문을 읽어 내려가면 다시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서사시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글들이 또 한 번 일목요연하게 나열되고... 그가 인용한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는 나를 떨게 만든다.

 

-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2330년 전 영웅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용감하게 살다가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죽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지만 그런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다시2480년 전, 진정한 영웅이었던 수메르의 우루크왕 길가메쉬도 그랬다가 혼줄이 났었다는 말이렷다. 저자가 써놓은 감상문의 끝을 감상하자니 막막하기만 하다.

 

- 신은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인간 앞에 내놓는다. 그러나 범인이든 영웅이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단지 작은 무덤일 뿐이다. 무서워라! 무서워라! 그러나 처녀가 시집가는 날 호기심과 설렘과 벅찬 마음에 가슴이 술렁이듯 그런 가슴을 안고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엔키의 말처럼 슬퍼하거나 절망하거나 의기소침할 것도 없이 다만 분노로 얽힌 마음만은 땅위에 내려놓고 흙으로 돌아갈 일이다.

 

그러나 난 여기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 처녀가 시집가는 날 호기심과 설렘과 벅찬 마음에 가슴이 술렁이듯 그런 가슴을 안고 죽음을 맞이하자.

 

이것이 바로 저자의 희망사항인 것이다.

 

 

 

6. 4부를 읽다

 

 

1부에서 3부까지는 인간이 주인공이며 신들이 보조역으로 나오는 길가메쉬 왕의 서사시라면, 4부는 신들이 주인공이며 인간이 단지 신들의 피조물로 나오는 수메르 신화의 엑기스나 다름없는 저자의 주옥같은 글이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길가메쉬 이전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제일 먼저 수메르는 악카드어 슈메루였다고 지적해준 다음 수메르어로는 수메르키엔기()’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그 뜻은 고귀한 주님의 땅, 또는 문명화된 통치자의 땅으로 그 뜻만 새겨보아도 그곳은 원시와 야만과 미개에서 벗어난 존귀한 문명인이 지배한 나라임에 틀림없다.’고 전해준다.

 

수메르 신들이 강림하여 땅을 개척하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다. -엔릴-엔키-난나-인안나-우투-닌투-이쉬쿠르-에레쉬키갈-남타르-아눈나키-이기기 같은, 학교 교육에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신들의 이름과 최초의 도시 에리두-바드티비라-라라크-슈루파크 같은 신들의 도시가 건설된 과정과 신들의 성격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 줄 두 줄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리스신화나 성경에서 읽었음직한 대목들이 겹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나는 기겁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신들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고 대홍수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저자가 던져준 문장들을 되풀이 읽으며 나는 다시 침몰한다! 그는, 인간은 신의 유전자와 흙의 유전자의 결합으로, 하늘의 유전자와 땅의 유전자의 결합으로 탄생되었다는 정보도 일러준다. 회남자(淮南子)라는 2100 여 년 전의 고서에는 이런 글이 있다.

 

- 정신적인 것은 하늘로부터 받으며 육체와 그 물질적인 형상은 땅에서 얻는다. 음과 양의 조화에 이 모든 조화가 따른다.

 

우트나피쉬팀은 노아의 원형이었다. 그렇지만 그이 말고도 아트라하시스가 있었고, 가장 윗자리에 지우쑤드라가 더 있었다. 노아는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어 등위에 들어 올 수조차 없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홍수 이후부터 길가메쉬까지의 수메르 왕들을 연대기를 확인하고, 다시 길가메쉬부터 싸르곤 왕까지의 연대기를 확인한다. 최초의 셈족 국가 악카드와 최초의 셈족 통치자 싸르곤의 출현으로 연대기는 끝난다.

 

그리고 난 뒤 저자는 이런 글을 남긴다.

 

- 태초에는 황금시대를 지배했던 최초의 신화의 주인공들인 수메르 신들이 있었고, ‘최초의 국가를 건설하고 다스렸던 수메르 왕들이 있었다. 그런 뒤에 최초의 셈족 국가악카드가 셈족 문명을 일으켰다. 싸르곤이 수메르의 왕이며, 악카드의 왕이라며 자랑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최초의 영웅은 실존 인물이었던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였다.

 

용사 길가메쉬, 닌순의 아들, 당신을 찬미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최초의 신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길가메쉬 서사시는 수메르 신화의 일부분이다. 영국의 시인으로 대서사시 <실락원>의 저자인 존 밀턴이 남긴 말을 기억하는가.

 

- 책은 어린이와 같이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책은 아무 것이나 급히 많이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여러모로 살펴 자세하게 읽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인류 최초의 신화가 수메르에서 태동되었다는 사실을, 그리스 신화와 히브리 신화 베레쉬트의 원형이라는 명쾌하고 유쾌하고 통쾌한 사실을 확인하려면, 먼저 1부에 3부까지 공을 들여 읽고, 저자의 해설도 면밀하게 읽어둔 다음, 여기 4부에서 수메르 신화의 산해진미를 맛보아야 될 일이다. 4부를 읽으면서 기겁하고 놀라서 여러 번 기절하면서 나는 유명한 프렌시스 베이컨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오로지 사색하고 검증하기 위해 책을 읽어라.

 

이번 기회에 2003년에 출간된 그의 책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도 정독하였다. 20일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대조해가면 계속 읽었다. 밥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간신히 1회 정독했다.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러나 소득은 정말 하늘의 이치를 다 얻은 듯, 우홧홧! 대단했다. 세상에 이런 책이 있었다니. 20년 동안 저자가 공부한 지혜를 단 20일 동안 취해버렸다. 얌체족이 따로 없다. 그리고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생전 처음 본 도판들은 좋았고,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게 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7. 길가메쉬 서사시를 올바르게 읽는 법

 

 

조지 스미스가 길가메쉬 서사시의 일부분을 대영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하여 읽게 된 때는, 호르무즈 라삼이라는 발굴가가 앗씨리아의 수도 니느웨에서 이 유물을 발견한 뒤로도 20년 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쌓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수많은 점토판들이 어느 박물관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2003429일 영국 BBC 방송 인터넷판의 기사도 소개해 두었다. 서사시에서 묘사된 것과 너무나도 유사한 무덤이 발굴된 것이다. H. 슐리만은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노래한 전설 속의 트로이를 실제로 발굴해냈고, 베레쉬트에서 히브리 저자가 감추어두듯 기록한 수메르의 전설적인 도시들도 거의 다 발굴되었다. 학자들에 의해 길가메쉬는 전설적인 영웅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영웅으로 우리 앞에 나섰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저자들은 수천 년 동안 꾸준히 표절과 개작을 해왔다. 그 와중에 히브리의 저자들도 있었고 그리스의 저자들도 있었다. 사실 표절과 개작은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특징이었다. 수메르에서 그리스와 이집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은 소아시아와 가나안이었다. 이 서사시는 수메르어, 악카드어, 히타이트어, 후리어, 엘람어, 히브리어 등으로 쓰였다. 히브리의 <베레쉬트>,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오디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일과 날들>, 그리고 <아라비안나이트> 등에서도 그 흔적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최초의 문명국 수메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세계관을 알려주는 문화적인 코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저자 김산해 선생이 전해주는, 길가메쉬 서사시의 수메르어 판본과 악카드어 판본을 모두, 고바빌로니아판본과 표준바빌로니아 판본을 모두 편하게 읽어 볼 수 있는 엄청난 최고의 특혜를 누리고 있다.

 

- 야생의 새들은 나뭇가지의 위에서 노래할 때

저들의 우두머리를 생각하지만

산 속의 꽃들이 꽂을 피울 때

그 참된 의미는 향기와 더불어 나온다.

 

어느 선승의 시 속에서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완전한 상통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닫힌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 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생각들을 훌훌 던져 버리고 읽어내려 가면서, 개인의 믿음을 접어두고 정독하면서, 자신의 환경유전자 속에 쌓여있던 주관과 객관에 대한 애착에서 초탈하여 책장을 넘길 때야말로 대지의 음악에서 하늘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기어코 하늘의 음악을 듣고야 말았다.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말이에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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