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사회의 나침반이 될 일본의 현대사


: 노마 필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인 「한강」에 나오는 구절이다. 2013년 상반기에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국정원 게이트를 두고 새롭게 곱씹을만한 말이기도 하다.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한 수사는 흐지부지해졌고, 채동욱 검찰청장은 사퇴했다. 이 결과에 이르기까지 언뜻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과정들도 석연치 못하다.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하는 진실”은 예로 든 사례뿐만 아니라, 최근 5년간 급속도로 우경화가 진행된 한국 현대 사회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이 현실 속에서도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인 개인으로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좋을까. 여기에 타국의 역사(이면서도 지금까지 이어오는 현재진행형의 현실)를 통해 그것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1988년, 쇼와 천황의 죽음을 앞둔 15년 전의 일본도 지금 우리 사회와 별다르지 않았다. 외세의 개입으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역사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흘러 왔다면, 당시의 일본은 패전 후로부터 일왕의 전쟁 책임을 묻지 못한 채로 일왕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자 노마 필드는 일본인 어머니와 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일문학자지만, 공정한 역사 인식을 토대로 모국인 일본에 대한 미화 없이 그 시기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또한 필드는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을 예견이라도 한 듯, 산업 개발로 풍요로웠던 쇼와 시대의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을 걱정하고, 90년대에 수많은 부작용을 낳은 일본 국철의 민영화에 대해 우려하고 있을 정도로 꼼꼼하고 뛰어난 통찰력으로 서술을 이끌어 가고 있다.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에서는 88~89년 일본에 체류하게 된 노마 필드의 시선을 따라서 거대한 외부 압력에 맞서 소신을 지키는 일본의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소신이란 대단한 혁명의 기치는 아니다. 하지만 한 나라를 뒤덮고 있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은 대단한 지성과 의지를 요하는 일로 읽힌다. 일반 도덕률에 맞춰 사는 평범한 시민마저도 지배 논리에 체념하게 만드는 사회는 올바른 사회일까. 단순한 상식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급진적인 사상으로 보이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일까. 또한 의견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생업과 생활 기반까지 흔들리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 이웃 나라의 한 단면을 통해 내 나라의 미래상을 보는 경험은 유쾌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필드가 갖춘 역사의식에 기대어 한국 사회가 나아갈 미래를 예언적으로 통찰해보는 것은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시민으로서 한번쯤은 필요한 일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억압에 대처하는 일본 시민 사회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비교하고, 한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지향점을 읽는 것을 중심으로 서평을 시작하고자 한다.


노마 필드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오끼나와이다. 오끼나와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비견되는 휴양섬이다. 아픈 현대사를 가진 남쪽 섬이라는 것마저도 비슷하다. 미군의 공세를 피해 도망간 장소에서 일본군과 함께 숨게 됐을 때, 갓난아이가 울자 제 손으로 아이의 입을 막은 아이 엄마의 이야기 등의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제주 4.3항쟁 때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비슷한 이야기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역사적인 맥락 상 4.3항쟁과 태평양 전쟁기의 오키나와 대학살을 1:1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폭력에 희생된 역사를 가진 주민들이, 폭력을 휘두른 주체가 지배세력을 이루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닮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흐름은 제주도에만 국한된 시각이 아니라 한국 전체로 확장시킬 수 있다. 오끼나와 주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그 지배계급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방식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의해 식민 지배를 당하게 된 류큐 섬은 일본의 패전 후에도 일본의 섬 오끼나와로 남았다. 류큐가 독립하지 못한 이유는, 미군이 주둔하기 좋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컸겠지만, 당시의 조선보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치열하지 않아서라는 견해 또한 존재하고 있다.


찌바나 쇼오이찌는 오키나와 요미딴촌의 슈퍼마켓 주인으로, 노마 필드가 오끼나와에서 만난 주인공 중 한명이다. 그는 정부에 대한 시위로 일장기를 불태웠다. 그는 그 일로 법적,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찌바나는 본토인(오끼나와 인들이 일본인들을 부르는 표현)에게 착취당한 고향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행동했다. 동시에 그는 오끼나와인들은 본토로부터의 탄압에 맞서는 대신, 그들의 그러한 역사 때문에 더욱 더 본토인들보다 자기네가 충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전쟁을 거들었다는 이면도 동시에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이 점이다. 노마 필드가 본 오끼나와의 주민들은 본토인들과 정부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끼나와인들은 본토인들을 미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같아지려고 눈물겹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반성할 이유가 없으며, 전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쪽에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동정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필드는 역사적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오키나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은 그들의 생명이 어떻게 소모되었는가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드가 두 번째로 만난 나까야 아쓰꼬는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하는 진실”을 체감하고 마주한 여인이다.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일본 정부가 자위대였던 남편을 신사에 모신 것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며, 원고 패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종교의 자유를 믿는 기독교 신자이면서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사에 위패가 세워진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사적인 영역의 자유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억압되고 침해되는 상황을 간파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에서 보듯 역사적 진실은 현실에서 해결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필드는 나까야 아쓰꼬의 “일상적 행위 속에 있는 추상적 압력을 간파하는 능력, 상식의 전횡을 감지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나까야 아쓰꼬와 같은 평범한 면모의 전형적인 중년부인이 체념하거나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끈질기게 싸우고 있는 것은 ‘인식하고 알아내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일 같이 느껴진다.


지난 해 대선 이후 우리나라는 빠르게 정치적으로 수구화 되어 가고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의 청장년층은 그러한 사회 현실 앞에서 저항할 새도 없이 소시민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5년 전 일본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고 소시민화 되어 있었다. 목적과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과정이라도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비판 의식을 기르고, 그 의식을 무디지 않게 다듬고 행동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까야 아쓰꼬는 훌륭한 대답을 제공한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큰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녀는 사회에 촘촘히 스며든 일상적인 억압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부장적 제도로부터 탈출했고, 여성으로서 겪는 불합리한 노동 현실로부터 탈출했다. 필드의 저술처럼, 권위 일반에 대해 회의하는 감각을 지니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동시에 그만큼이나 현대 사회를 살아갈 때는 그런 감각으로부터 도출된 결과가 권위에 대한 저항 혹은 탈출이라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견은 노마 필드가 나가사끼에서 만난 다음의 세 번째 인물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일왕의 서거를 앞둔 1988년 9월에서부터 1989년 1월, 일본 언론의 행태는 흥미로웠다. 그들은 일본 시민들에게 천황이 가지는 신성성을 방패로 하여 천황의 전쟁 책임을 숨기고 덮어두기 위해 전략적으로 기사를 써댔다. 용어사용부터 논조까지 전술적이었다. 일본의 커다란 상징의 죽음 앞에, 언론이 재생산해낸 신화적이고 신성적인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상식이 억압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있는 시민들도, 그 권위에 차마 맞서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시민들에게 진실이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사회 지배층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몇몇 시민들은 천황이 죽으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데에 대한 반성은 과거의 일로 덮고 가게 될 것을 예감했고, 그 순간을 목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실천하지 못했다.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는 경제적 풍요로움이 만들어 낸 허상처럼 보였다.


노마 필드는 일본의 지배층을 구성하는 우익 군국주의자들과 문부성의 전쟁 정당화 논리는 시간적 순서를 인과 관계로 바꿔놓는 그릇된 논리로부터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전쟁과 경제발전이라는 단순한 직선적 시간 흐름을, 전쟁 때문에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이 있다는 식으로 곡해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군사 독재 덕분에 오늘날의 경제 발전이 있다는 우리나라의 수구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대목에 이르러, 전쟁의 책임을 청산하지 못한 채 이룬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에 빗대어 독재 잔재를 다 청산하지 못한 채 얻어낸 우리나라의 반쪽짜리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쇼와 천황의 서거 후 왕위를 물려받은 아키히토 일왕은 현재까지도 전쟁 피해에 대한 적극적인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2013년 현재 한국에선 군사 독재 유산을 계승한 정권이 지지받고 있다. 수구 이데올로기로 부터 소외된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처한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정치적 냉소주의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노마 필드가 소개한 15년 전 일본의 상황으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희망을 보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그 시기에 자신의 의견과 역사적 견해를 굽히지 않고 그 시기를 살아낸 시민이 있기 때문이다. 노마 필드가 만난 마지막 인물, 나가사끼의 시장 모또시마 히또시이다.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라는 상식을 표현했을 뿐이지만, 그는 우익 세력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과거에 대한 부단한 성찰로 지니게 된 올바른 역사인식 뿐만 아니라, 위협과 협박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일관성이 있었다. 그를 숨죽여 지지하는 시민들의 편지가 쏟아졌다. 그 중 고등학생의 편지도 있었는데, 군국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배층이 언론과 여론몰이를 통해서 현실 속에서 진실을 무던히 가리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고등학생이 알아 챌 정도로 역사적 진실이란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는 노마 필드의 감정에 깊게 공감했다. 또한 모또시마에게 많은 격려의 편지를 보내온 일본의 시민들만큼, 한국의 시민들도 중요한 순간에 기꺼이 행동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우리나라에는 자랑스러운 시민운동의 역사가 많다. 일제강점기의 3.1운동부터, 4.19, 5.18, 6.29, 노 대통령 때의 탄핵반대 물결 등 언제나 기득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하나씩 쟁취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시민들은 지금 잠시 게걸음을 한다 해도 역사는 구구하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아직 버리지 않아도 되는 증거의 국민이라는 예감이 든다.


노마 필드는 모또시마 히또시를 인터뷰하면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은, 이렇게 말하면 남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노마 필드가 소개해 준 세 사람과, 기꺼이 그들을 지지하고 함께 행동해주는 수많은 시민들은 결코 비범하거나 원대하게 태어난 영웅들은 아니다. 유혈시위를 일으켜서 피의 숙청을 시작하는 혁명가도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회 구성원에 가깝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약한 개인이기에 그들의 행동이 더 위대해 보인다. 노마 필드의 언급처럼, 용기란 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더라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잡해지고 교묘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일상 속에 스며든 억압을 알아채기는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기만과 왜곡을 알아차리는 예민한 역사적 감수성과, 그것에 저항해 기꺼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때인 듯하다. 언뜻 누구나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책의 가치는 이웃 나라의 케이스를 통해 우리가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 갈 현대의 한국에서 어떤 지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제시하는 데에 있다. 도입부의 구절처럼, 정의와 진실은 긴 역사 속에서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 95년에 한국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버마의 명칭을 미얀마라고 하지 않고 버마라고 써준 정치적 공정성이 돋보인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싱가포르까지 배려한 균형감각도 좋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관련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종종 들곤 하는, 한 때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느끼게 되는 묘한 위화감이 없었던 책이었다. 다만 분량의 한계로 오끼나와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폭력에 비해 미군이 주둔하며 일으킨 피해에 대해선 상세히 언급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15년이 지난 지금, 오끼나와의 요미탄촌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촌락이라고 한다. 책에 등장한 요미탄촌의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관광 평화단지를 조성하고, 민주적으로 촌락을 운영해가고 있다. 찌바나 쇼오이치는 그 곳에서 누가야라는 민박을 운영하면서, 요미딴촌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오키나와 주민들과 미군, 일본군에 얽힌 억압된 역사와 아픔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깊은 감명을 주었던 용감한 시민을 한번쯤 직접 만나서 응원을 전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떤 사람인 지 마주 보고, 생각보다 평범한 분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비범한 인물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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