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다.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이 모순적 존재는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하고 있다.-50쪽
유퇴아는 언제나 아포칼립스와 함께 간다. 유토피아에서 아포칼립스만을 보는 시선은 아포칼립스에서 유토피아를 찾는 시선보다 더 안타깝다. 이 파국의 세상에서 유토피아적 열정을 모조리 거세하려고 할 때 진정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미 풍요롭고 여유로운 부자들인가?-106쪽
모든 사회적 조건이 위기에 직면한 듯 보이는 파국의 상황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유토피아의 사건들에 주목할, 어쩌면 가장 좋은 시간이다.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에 서려 있는 비동시성과 과잉성이라는 '시대착오적' 성격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실천해내는, 그럼으로써 가장 현재적으로 동시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토양이 된다.-108쪽
미국의 헤게모니가 손상된 것을 두고 섣불리 '어떤 역사의 종언'을 다시 선언하는 것 역시 바보스러운 일이다. (...) 자본주의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정기적 경제 위기 사이클과 반자본주의적 저항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것은 때로는 강압으로, 때로는 타협으로 언제자 자신에게 유리한 질서를 재편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126쪽
오늘날 지배적 질서의 힘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의 자신에 대한 '거침없는 긍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태도에 있다.-129쪽
쉽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결코 혁명적 계기로 자동변환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두려움과 떨림을 동반한 개별자의 지난한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얻은 즐거움은 그 자체로 곧 혁명이다. -142쪽
이웃을 욕망하기, 이웃이 가진 것을 갖기, 이웃처럼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이 욕망의 모방적 속성은 사회적 동질성을 낳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경쟁과 적대와 폭력을 낳는 것이다. (...)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질 수 있는 거소가 없는 것이 엄격하게 규정된 신분제 사회에서는 불가능했던 위기는 평등이 선보인 민주주의에서 비로소 실제적 위기가 된다.-146쪽
민주주의의 문화적 힘은 바로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치인데, 이미 모두가 평등하다고 규정된 곳에서는 자신이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엄청난 투쟁이 벌어진다. (...)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행복한' 결합은 소비와 욕망과 폭력의 과잉을 낳는다. 이 과잉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다. 빈부의 격차, 경쟁과 생활고로 인한 자살, 실업률, 증오 범죄, 무차별 범죄의 급증은 이 과잉의 증거다. -178쪽
모든 것이 완벽한 천상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몰락하는 것"으로서만, 혼돈으로 가득한 땅으로 떨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땅은 바로 '세상'이 있는 곳이고, 그 땅을 배제한 채 만들어지는 천상의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니체의 '초인'이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땅의 사람인 이유다. 땅이 있는 현실의 가치를 부단히 뒤집는 일은 허무를 극복하고, 가장 작은 데서부터 새로운 가치를 벼려내는 일이다. 오늘날 텍스트에서 창궐하는 살인자와 늑대와 좀비가 안내하는 곳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의 현실이다. 판이 깨어지는 세계에 대한 파국의 상상력은 이렇게 다시, 갈라지는 땅이라는 지진의 이미지로 회귀한다.-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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