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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BL] 우화 (총3권/완결)
유우지 / 더클북컴퍼니 / 2021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나 지나치게 약하고 아팠던 탓에 따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여동생과 함께 살겠다는 일념으로 학교의 촉망받는 기대주가 되었던 영준은 어느 날 신입생들 사이에서 봐서는 안 될 얼굴을 발견하게 돼요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죄책감에 불안을 지울 수 없던 영준이지만 정작 상대인 철의는 영준을 알아보지 못하고 호감을 가진 채로 다가와요 어느덧 여동생마저 그들 사이에 얽히면서 영준은 스스로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음을 자각해요 그러나 철의를 향해 작게 움튼 욕심에 조금만 더를 바라며 관계를 놓아버리지 못해요
본의 아니게 철의를 속이고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기대와 설렘을 놓아버리지 못했던 어린 날의 영준. 세상에 남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철의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겠다며 옆에만 있게 해달라 집요하게 다가간 현재의 영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이기적이고 미숙하며 일방적인 지독한 짝사랑이지만 그래서 더 위태롭고 서러우며 외롭게만 느껴졌던 짝사랑이 아니었나 싶어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영준 역시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데 그럼에도 상대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고 가까워질 수도 없는 사이죠 자신은 불륜을 통해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로 인해 잘 살아갔을지도 모를 모자의 일상이 산산조각났으니까요 속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할 수 없고 말하고 싶지 않은 스스로의 모순이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영준이라고 자신의 요구가 이기적임을 몰랐을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이자 마지막이 단 하나였을 뿐이고 미련으로 남은 작은 감정에 아주 조금 쉴 틈을 주고 싶었던 것 그것 뿐이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행동들이 철의에게 어떤식으로 남을지에 대해서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뿐이요
작품을 읽는 동안 철의가 모질다는 생각이 들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미래를 그렸던 대상들이 실은 자신의 일상을 망가트린 두 사람의 자식이었으며 그걸 알면서도 자신과의 만남을 이어왔다고 하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과거에 그렇게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사라진 사람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위한다며 무수한 거절과 거부에도 일방적으로 집요하게 다가온다면 더욱이요 폭행 자체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긴 시간 억눌러왔던 이슈가 우연한 기폭제로 인해 한번에 터진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쉬웠던 건 그저 그런식으로 모든 걸 터트린 후 완전한 단절이 가능해진 상대를 두고 결국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 먹었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하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할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어요 어린시절이야 미숙했고 가깝다고 해도 남자를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각할 여력이 없었지만 나이를 먹고 이만큼 돌고 돌아왔으면 분노를 뒷받침 중인 감정이 조금은 다르다는 걸 자각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거든요 분노와 애증의 증이 너무 오랜 시간 앞서버려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후에야 이상을 자각했다는게 그게 참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사이를 바꾸는 세 번의 전환점을 거쳤어요 작중 영준의 말을 통해 영준이 한차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이 드러났고 철의는 진실로 영준이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누군가의 인내와 서러움 고단함이 고스란히 배어있던 기다림은 이제 상대를 바꾸어 초조함과 막연함을 동반하는 새로운 기다림으로 이어져요 서로를 곁에 두고도 이제서야, 그것도 조금 다른 무게의 감정을 가진 채로 상대의 곁에 발을 붙이기로 마음먹은 두 사람이기에 보는 내내 먹먹하다는 말뿐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몇 번을 두고 읽어도 아마 먹먹함과 씁쓸함 또 근본적인 원인에서 연민을 더 크게 느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어요 철의와 영준의 인연이 조금 더 평범했다면 어땠을까도 가정해보지만 두 사람이 무탈하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을 거라는 이야기 만큼이나 의미 없다는 걸 실감하기만 했어요 모든게 잘 풀려 두 사람은 행복해졌습니다 라는 단언적인 결말은 없지만 철의에 말마따나 언젠가 영준이의 눈에도 허무가 사라지고 안온한 다정함과 내일을 바라는 이상이 다시금 들어찰 날이 오겠죠 그런 날이 두 사람에게 빠르게 찾아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