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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평점 :
한번 손에 쥐면 놓기가 어려운, 대단히 재미 있는 소설이다. 현대적 장르로 분류해 보면 이 소설은 우선 로맨스에 해당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현대 로맨스가 통상 여성의 시각에서 전개되는 반면 구운몽에서는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주인공인 비구 성진이 꿈속에서 8명의 절세가인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인 스토리다. 따라서 이 소설은 남성의 시각에서 쓰인 로맨스라 할 만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이 로맨스라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장르소설은 무협지다. 이 소설은 또한 무협지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흔히 무협지의 주인공은 못하는 것이 없는 엄친아이며, 별다른 수작을 걸지 않아도 여자들이 줄줄 따르는 호걸이다. 성진이 환생한 양소유는 장동건이 울고 갈 절세 호남이며, 문장이면 문장, 악기면 악기, 무공이면 무공, 책략이면 책략,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능력자다. 거기에 매일 밤 8명의 처첩을 번갈아 가며 상대하는 정력남이기도 하다. 세상의 절세가인이 모든 다른 남자를 마다하고 양소유의 여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매력남이기도 하다. 게다가 8명의 처첩이 아무런 갈등없이 자매처럼 한집에 살며 양소유만을 섬기며 사랑한다. 그것은 바로 남자들이 꿈꾸는 세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보통의 남자들이 무협지를 읽으며 잠시나마 그 속의 영웅이 되어 비루한 현실을 잊는 것처럼, 그리고 평범한 여자들이 로맨스에 빠져 신데렐라의 판타지를 꿈꾸는 것처럼, 이 책은 현실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그리고 있다. 결국 구운몽의 마지막은 그 이룰 수 없는 욕망의 덧없음, 허망함을 묘사할 수 밖에 없는 알레고리를 처음부터 내포하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양소유가 보여준 욕망의 구현이 이 소설의 날줄이라면 성진이 깨닳은 욕망의 덧없음은 이 소설의 씨줄이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다면 나는 나비의 꿈을 꾼 인간인가? 인간의 꿈을 꾼 나비인가? 그냥 전체 스토리만 놓고 보면 동네 대여점에서 흔히 빌려볼 수 있는 로맨스나 무협지에 불과하지만 김만중은 마지막에 나름의 철학적 장치를 통해 구운몽을 '문학'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전체플롯이 통속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세인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미화하려 해도 이 소설은 통속 애정소설에 다름아니다. 점잔빼는 사대부들이(그 당시는 예론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을 보고 낄낄 거렸을 것을 생각을 하니 인간의 본성과 욕망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상기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 책이 청상에 홀로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전언이다. 철저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쓰인 남성 우월적 모험담이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물론 조선후기에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임을 인정하나, 그럼에도 허균은 서자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더욱이 당시 소설(패설)이란 장르는 사대부가 이름을 걸고 떳떳하게 내놓을 만한 글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정말 어머니를 위한 책이었다면 내친 김에 여성적 관점의 소설을 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집필했다기보다는 귀양간 자기 삶의 덧없음을 반추하며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추론해본다.
그러한 심중이 보다 깊이 가는 부분은 소설의 노골적인 성애 묘사다. 청상과부 어머니에게 남녀 간의 애정사와 성애를 메인 스토리로 하는 소설을 써서 바치면 그간의 외로움이 위로가 될까? 더욱이 낯뜨거운 장면도 많이 등장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부모자식 간에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했는지 모르겠지만 현대 한국인의 윤리의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과연 이런 잡설이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에 올라 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고전의 기준은 무엇인지, 내가 쓴 이글도 400년만 지나면 고전이 될지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