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라틴어 원전을 충실하게 완역한 탁월한 정본
보에티우스 지음, 이세운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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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9월 유관순(19021920) 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19871월 박종철(19651987) 열사도 서울 용산구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아벨은 신실한 삶을 살다가 들판에서 그의 형 가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남국 유다 제8대 임금 요아스의 재위 말년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도 직언하다가 성전 뜰에서 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양심과 정의에 따라 투철하게 살던 이가 어느 날 악한 마음을 품은 자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다.


로마 사람으로서 행정장관으로 비견되는 콘술(Consul)을 역임한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75?~524?)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약자들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자를 막기도 하였고, 한 왕실 관리인이 시도하던 악행을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기근이 들어 강제매입이 선포되었을 때 이에 반하다가 왕이 심문하는 자리에서 강하게 주장하여 그 시행을 취소시켰으며, 원로원 의원인 알비누스가 판결도 나기 전에 처벌받는 것을 막으려고 밀고자 퀴프리아누스의 공격을 대신 받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입법 기관 원로원을 변호하다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유배되었다. 동고트(Ostrogothi) 왕국의 통치자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알비누스에게 씌워진 반역죄를 원로원 전체에게 전가하였던 것이다. 원로원 의원 모두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에티우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무죄를 위해 변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선행의 결실로, 밀고자가 원로원을 반역 죄인으로 만들 문서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것으로 고발을 당하고, 아무 심문절차 없이 멀리 유배지에 보내져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째서 양심과 정의에 따라 투철하게 살던 이의 결말이 이렇단 말인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을 섭리라고 부를진대, 선한 삶을 살던 이의 결국이 악한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자연은 늘 어떠한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어서, 나무는 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낙엽을 떨구며, 땅에서 볼 때 하늘의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태풍은 북반구에서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인간 양심에는 도덕률이라는 법칙이 관통하고 있음에도 인간은 양심을 따라 행하기도, 혹은 양심을 배반하여 행하기도 한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신이 없다면 선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은 권선징악을 통하여 사회를 정화시키고자 분투하고, 도덕률은 그에 따라 사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도덕률을 견지하던 이의 결국이 그와 같다면 도대체 권선징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곧 처형될 보에티우스는 위와 같은 외침으로써 권선징악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보에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 이제 가련한 대지를 돌아보시기를

자연의 법칙을 엮으시는 분이시여.


그토록 위대한 것들 중에서도 가치 있는 

우리 인간들은 

파도치는 바다로 인해 흔들립니다.


지배자시여

거친 파도를 억누르시고, 거대한 하늘을 지배하시는 

당신의 그 약속으로

땅도 또한 평온하게 지켜 주십시오.

 

보에티우스는 죽임을 당할 시점에 위와 같이 기원하기를, 한결같은 자연과 같이 인간 사회에서도 항상 평화가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은, 자연은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반면, 인간은 그 양심을 지배하는 도덕률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이를 따라 행할 것인지 아닌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여신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재정의(再定義)하였다.

 

그는 … 

그의 고삐에 의해 인도되고 

그의 정의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자유라 여기는 자다.

 

보에티우스는 자유에 대해서 재정의하기를, 문맥에 의거하여 철학을 통치하는 단 하나의 지도자곧 그의 정의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사야 1:19, 고린도전서 9:27)이라고 했다. 보에티우스는 만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듯, 인간 또한 그 양심에 흐르는 도덕률을 따름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을 권하고 있다.

 

생겨난 것은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은 채 머무르지 못한다.

이는 영원한 법을 통해 

굳게 자리 잡았으니.

 

자연에서의 법칙과 인간 사회에서의 도덕률을 아우르는 불변의 진리는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것(전도서 1:9), 즉 보에티우스가 말한 위의 시와 같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변화한다는 것이다(히브리서 12:27). 꽃이 시들고 풀이 마르는 것처럼(이사야 40:8), 인간 또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낮은 바위에 

굳건하게 집을 세워야 함을 기억하라.


바람이 

평온한 바다를 뒤집고 돌진하며 

천둥소리를 낸다 해도,


평온을 품은 벽의 힘으로 지어져 

행복한 너는

하늘의 화를 비웃으며 

즐거이 삶을 영위할 것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나는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미련을 두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로 마냥 기뻐하며 이것이 행복인양 즐거워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때로는 내게 주어진 것들이 상하거나 없어질까 두려워하며 염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게 있던 것이 닳거나 사라짐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비통해한다. 하물며 선한 일을 하다가 피해를 입는다면 얼마나 당황하며 원망할까.


세월의 풍파가 내 삶을 뒤집으며 천둥소리를 낸다고 하여도, 그 때에 나는 이성과 철학으로부터 위로를 얻어 하늘의 화를 비웃을 수 있을까? 그 때에 나는 과연 평온한 마음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에게는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 아닐까? 내가 애초 적신(赤身)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매순간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 수만 있다면 다행이겠다.


2019.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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