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기타노 다케시. 그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기타노 다케시가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맡았던 영화 ‘소나티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모든 감정이 배제된 아니 모든 감정이 소멸된 듯한 표정으로 다른 야쿠자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고 마치 탄창이 비어 있는 권총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바로 그 장면.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은 그의 영화 소나티네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장난인 듯, 총알이 없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독자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총구를 들이대었지만 실상은 실탄이 장전된 총으로 난사하고 있다. 위협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장난이나 농담이 아닌 진담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나티네와 책 <위험한 일본학>의 차이가 있다면 영화에서는 총알이 장착된 권총으로 난사를 가했다면 <위험한 일본학>은 언어를 총알 삼아 권총 대신 책을 통해 독설을 난사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의견들을 모두 폄하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정 부분 공감하기도 했고 공통의 관심사가 발견되기도 했으니까. 이를테면 미국의 행태를 일본 야쿠자의 행태에 비유하면서 애초에 미국과 일본은 동등하고 독자적인 외교가 불가능한 구조임을 비판하는 대목이 그러했다. 또한 일본인이 불행한 원인 중 하나를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조소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더 이상 설자리가 없는 가여운 아버지들의 대한 근심, 땅바닥으로 떨어진 선생님의 권위, IT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양산되고 있는 경제적 불균형과 양극화, 정보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처지에 대한 염려 등, 일정 부분 공감했고 어느 정도 소통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생각들, 의견들, 독설들을 그저 웃으면서 읽어내려 갈 수만은 없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고, 용서되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저열하고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사고들에 대해서는 공감할 도리가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행위들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반성은커녕 히틀러에 비해 한심한 무리로 치부해버리는 연합국에 대한 그의 짤막한 의견 속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받아들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가늠해 볼 수 있다-그의 뻔뻔스러움이 놀랍다. 그가 만들어 낸 일명 ‘다케시 내각’의 연설을 잠시 들여다볼까. 중국과 한국이 역사교과서 같은 문제로 항의를 해오면 외교를 끊어버리면 그만이고, 러시아가 북방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려 하면 대사와 기업을 전부 철수시키면 된다. 모든 나라와 사이좋게 지낼 필요는 없으니 그저 의존할 수 있고 신용할 수 있는 나라와 긴밀하게 사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케시 내각 곧 기타노 다케시의 사고회로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떨어지고 그에 비해 아이들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아이들이 거만해지다 못해 끔찍한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의 근원적인 이유로 전후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교육 탓이라는 다케시의 의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실소를 금치 못한다. 기껏 이 의견에 대한 근거로 ‘어머니의 폭주’라는 당치않은 표현과 함께 예로 든 것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친자식을 죽이려다 체포된 한 여성의 사건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오류들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가장 치졸하다고 생각하는 대표성을 결여한 사례를 근거로 삼고 일반화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기타노 다케시는 즐겨 사용한다. 아직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어머니가 지극히 많고도 많다는 사실을 그가 정말 모를까.



얼마 전 기사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을 두고 제목을 <위험한 다케시>로 지었어야 맞다는 기사를 보았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위험한 일본학>의 서두에서 다케시는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나 다양한 얼굴을 한 ‘불행’이며, ‘행복’은 언제나 아주 먼 과거에만 있는 것이란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영화 소나티네와 그의 저서 <위험한 일본학>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채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관념과 사고들은 결국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저 멀리 떼어놓는 결과를 낳고 있으니까. 이 책의 제목은 <위험한 다케시>보다는 <불행한 다케시> 내지는 <불쌍한 다케시>라고 지었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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