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 단편
연두 지음 / 청어람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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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설들이 워낙 넘치는 판국이고 괜찮은 책에는 이미 많은 독자들이 서평을 근사하게 쓰시는 터라 엔간하면 안쓰고 넘어가지만 먼저 올라온 서평이 야박해 글을 올립니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배우자를 찾고 알콩달콩 사랑싸움하는 흔하디흔한 로설이려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한두장 읽어내려가다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아,  또 한 권의 괜찮은 책이 장르를 잘못 잡아 독자들에게서 씹히겠구나... 하구요.

'반려'는 절대로 멋지구리한 주인공들의 판타스틱한 연애담으로 대리만족시켜주는 가벼운 로맨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 드라마장르에서의 '소설' 에 가깝다고 봐야합니다.

주인공들은 그리 잘생기거나 예쁘지 않으며, 삼각관계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 추스리기 벅차하는 반쪽짜리 상처투성이 인생들입니다. 재벌 2세나 모델, 영화배우, 이런 류의 사람들은 콧빼기도 안보이고, 안그래도 험한 인생살이에 비수를 꽂고 비틀어대는 주변 인물들과의 질기고 모진 인연에 힘겨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려'에는 책을 붙든 후로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절절하게 녹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줍잖게 꾸며진 허술한 세계관을 갖다대는 판타지도 아니고 이름만 바꾼 서양판 할리퀸 복사물도 아닌 바로 내 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더 숨죽이고 책에 몰입하게 됩니다. 눈을 돌리고 외면하고싶은 어두운 현실을 다룬 이야기라 더 절절하게 가슴아팠던 것 같구요.

여주인공은 가족들과 애인의 배신과 성폭력으로 딱지 가득한 기억들을 힘겹게 싸매고 연명하듯 살아가는 만화기획자입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다시 피가 흐르는 상처들을 치료하지도, 놓아주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미 여러번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지금도 일하는 책상 바로 위에 녹슨 면도날을 놓아두고 사는 위태위태한 여자입니다.

남주인공은 외교관인 자신의 일에 몰두해 먼 타향에서 임신한 아내를 무심히 대하다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태아와 아내를 한꺼번에 잃고 자책과 후회를 곱씹으며 어두운 터널같은 나날들을 휘적휘적 살아나가는 남자입니다. 다정하고 진지한 좋은 남자지만 자신의 상처가 깊고 커서 생애 하나뿐인 진정한 반려를 만났음을 자각하면서도 여주인공의 상처까지 끌어안기가 버겁습니다.

두 사람의 우연한 하룻밤 동침이 여주인공의 임신으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얽키게 되고 각자 짊어진 인연들과 설키게 되면서 서로에게 진정한 반려가 되어가는 말그대로 피눈물나게 힘겨운 여정을 걸어나갑니다. 외강내유형인 여주인공과 외유내강인 남주인공이 왜 더 빨리 만나지 못했을까 안타까울만큼 둘의 여정은 위태롭고 험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읽으시면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꼽는 좋은 책의 기준은 두 가지인데요, 얼마나 몰입하게 하는가와 얼마나 생각하게 하는가입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10점 중 8점입니다.  감점요인은 작가의 의욕이 앞서 너무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 오히려 집중을 방해했다는 점과 명색이 로맨스소설임에도 로맨틱하게 가슴떨리는 장면이 너무 적다는 점입니다. 에필로그까지 불안하게 조마조마하면서 책을 읽게 한 작가님에 대한 심술이랄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 체코 프라하에서나마 편안하게 둘의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볼수 있어 다행이었을까요? 그나마 그 둘은 훌쩍 떠날 수나 있었지,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박혀 있어야 할 많은 상처입은 영혼들은 어찌 살아야 할지 생각하며 가슴아프기도 했습니다.

현실에 뿌리박힌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선호하시는 분들께 좋겠구요. 그게 아니더라도 여자들 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로맨스라는 편견을 버리고 보시면 페미니즘 휴먼드라마에 가까운 책이고, 남자들 사이에서 거의 보편적이다시피한 여성 육체의 물질화와 객체화가 폭력성과 만났을 때 어떻게 여성의 인격과 생애를 망가뜨릴 수 있는지 눈돌리지 않고 보여주는 책이니까요. 대다수의 남성들과 상당수의 여성들이 강간과 성폭력에서 피해자의 귀책사유를 인정하고 있는 현실은 반드시 시정돼야 하며, 강간을 미화하는 상당수의 로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풍조도 꼭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여성독자들부터 인식해야합니다. 최대 피해자는 여성이니까요.

사족이지만, 로설만큼 개인취향차에 따른 감동과 평가가 엇갈리는 문학장르도 없을 것 같네요. 먼저 쓰신 분은 임신과 출산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썼을 거라 혹평하셨지만 애 둘 있는 30대 아줌마인 제 입장에서는 구구절절 옳은 묘사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임신과 출산도 개인차가 크다는 말이겠지요. 무엇보다도 본인이 읽은 후 판단을 내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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