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환 -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며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닌, 거기에 뚜렷히 있는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일까요.-51쪽

제가 오늘 여기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할머니와 그보다 더 위에 선조들로부터 무등을 타듯 이어 내려온, 오로지 그 덕분이지요. 그것이 확실합니다. 당신과 플라타너스 밑을, 밑으로 처진 나뭇가지 때문에 간혹 허리를 굽혀 걷던 때 저는 문득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몸속에 흐르고 있는 선조들의 피,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 까마득한 그 너머 어머니들의 숨결을 느꼈지요. 그녀들이 무등을 태워 저를 여기 이 아름다운 플라타너스 거리에 결국 세워놓은 것이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맛보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운명조차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 혹은 한들이 뭉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53-54쪽

눈 속에 박혀있는 유령 같은 나무들의 영상, 그것은 무엇일까요. 막막하며 적막하고 깊고 고요한 그 풍경은. 전쟁도 포 소리도 추위도 배고픔도 어머니도 동생도 주먹밥도 그리고 나마저도, 모든 것이 멀리 물러가고 오로지 눈과 대면하면 그 눈이 보았던 것은...
그것은 이 세상이었을까요. 이 세상은 있는 것일까요 혹은 없는 것일까요. 당신이 어둠 속에서 저를 불렀을 때, 갑자기 거리의 많은 사람들, 모든 것이 다 물러가고 당신과 나, 아니 내가 아닌 내 눈만이 거기게 있던 것과도 흡사합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 인생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우리가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순간적으로 맛보게 해준 것이었을까요.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그 가능성, 아니 무엇인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열리고 더욱 열리며 아름다운 자유의 개념 같은 것,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자 하는 조건 같은 것, 그런 것에의 형상화가 아니었을까요.
혼돈이며 땅으로 떨어지는 쪽이 아닌 최선의 것, 아마 그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과는 정반대 쪽에 서 있었습니다.-56-57쪽

당신을 얻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 도대체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꿈의 시간은 바로 언제인 것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은 지금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꿈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련만 아직도 어디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같은 기분은? 어린 시절 눈을 보면서 왠지 반가운 일이 이제 앞날에 올 것 같던, 그 앞날이 아직도 온 것 같지 않으며, 아직도 이제 앞날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