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 돌 - 서구문명에서 육체와 도시 문화과학 이론신서 14
리차드 세넷 지음, 임동근 외 옮김 / 문화과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나는 리차드 세넷(Richard Sennett)의<살과 돌>(임동근 외 역, 문화과학사, 1999)이라는 책을 읽었다. 서문에 따르면, 어느 날 세넷은 월남전에서 손 하나를 잃은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전쟁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관객들은 영화 내내 그 장엄한 장면들을 보며 박수를 치고 스펙터클에 감동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자 극장을 나온 관객들, 영화 속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던 그 관객들은 손 하나가 없는 세넷의 친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불안하게 스쳐갔다고 한다.

세넷은 말한다. '우리는 곧 군중 속의 섬이 되어 버렸다.' 세넷의 경험은 공간 속에 다양성과 차이가 무관심과 개인주의로 인해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는 연대와 공공성의 상실이다. 오늘날 대학가가 이와 다르지 않다. 주말마다 북적이는 대학가의 가로에서 우리는 '곧 군중 속의 섬'이 된다.

적어도 지난 세대들에게 대학가는 연대의 공간이었다. 대학가라는 이름 자체가 대학과의 긴밀함을 지시하며, 대학과의 관계 속에 성장해 왔음을 암시한다. 우리의 70년대 선배들은 음악다방과 작은 술집이 들어선 대학가에서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연대를 확인했다. 80년대 선배들은 최루탄과 돌멩이로 가득찬 대학가를 달리며 정치적 공공성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상대적으로 차이와 다양성이 부족했다. 마르크스 아닌 스포츠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으며, 연대와 공공성의 집회 공간 대신 칸막이 도서관으로의 진입은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90년대. 억압되었던 차이와 다양성이 분출하지만, 각종 소비문화와 '난 나야'라는 개인주의가 대학가를 잠식해가면서 연대와 공공성의 원리는 깨어져 갔다. 이젠 스포츠 신문 대신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은 고리타분한 짓이며, 도서관 대신 등록금 투쟁 집회 장소에 앉아 있는 학우들을 우리는 '힐끔힐끔 쳐다보며 불안하게 스쳐'간다. 여기서 90년대의 차이와 다양성 배후에 '무관심'이 있음을 발견한다.

무관심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세넷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이미지 레퍼토리'를 인용하면서, 개인은 복잡하거나 생소한 이미지를 접하면 어떤 사회적 편견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틀로 분류해 버린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백인은 거리에서 흑인이나 아랍인을 만나면 위협을 인식하고 더 이상 자세히 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미지 레퍼토리를 통해 공간의 복잡성과 불안정한 자극들을 배제시켜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학가에서 노점상을 하는 구리 빛 얼굴의 동남아시아 사람을 '더 이상 자세히 보려 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는 대학가 속에서 '군중 속의 섬'이 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만다. 공간의 공공성을 회복을 모색하는 세넷은, 각 개인들이 이미지 레퍼토리를 극복하고 타인과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소외, 자극, 고통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다르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한 자극으로 인해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연대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우리의 대학의 공간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90년대의 다양성 속에서 70∼80년대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통 공간의 확보를 통한 공론의 형성이 요구된다. 공론의 형성, 그것은 연대와 차이의 변증법적 지양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이젠 스포츠 신문을 읽으면서도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등록금 투쟁 집회에 지지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연대와 차이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공간, 그것이 2000년대에 지향해야 할 대학가의 공간인 것이다. 세넷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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