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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평점 :
『고잉 홈』은 9개의 단편소설을 모아 펴낸 단편소설집이다. 문지혁 작가의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를 모두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고잉 홈』 또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게 되었다.
9개의 단편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 유학생’이라는 점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유학생이라는 신분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소위 ‘돈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한 상류층’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의 현실은 오히려 보험이 없어서 병원 대신 약국으로 달려가고, 시카고로 돌아가기 위해 500달러를 준다는 알바를 하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사실 그녀 외에도 수많은 여자를 동시에 좋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모두 ‘가로세로 반듯한 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랑은 건조하다 못해 퍼석퍼석하고, 그들의 삶은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관계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특히 네 번째 이야기가 좋았기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네 번째 이야기인 「크리스마스 캐러셀」은 주인공 ‘나’가 디즈니월드에서 사촌동생 ‘에밀리’를 잃어버리고 그녀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에밀리는 ‘나’의 고모에게 입양된 아이인데, 에밀리의 전 가족들은 에밀리만 디즈니월드에 남겨두고 모두 동반 자살을 택했다. 모두가 에밀리는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고, 에밀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디즈니월드에서 ‘다시’ 혼자 남겨져보기를 택했던 에밀리는 스스로가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때의 어머니가 자신을 오히려 살려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사실 실제로 에밀리가 버려졌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별을 대하는 에밀리의 태도이다. 과거 에밀리가 디즈니월드에서 혼자 남겨진 그 날은 에밀리에게는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일 것이다. 실제로 에밀리는 당시 그 날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상태라는 의료진의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는 스스로 다시 한 번 가장 가깝고 소중한 가족과의 (잠깐이었지만) 이별을 택한다. 그리고 용감하게 이별을 다시 겪어낸다.
누군가에게는 미련한 실수의 반복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고통을 굳이 자의로 선택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되풀이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진짜’에 닿기 위한 과정의 일부가 ‘고통의 반복’일 때가 있다. 에밀리의 첫 이별은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채 황급히 묻혀버려서 오히려 에밀리와 그녀의 새 가족들에게 불안으로 남았다. 이 불안은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라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만, 누구도 원인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고 가리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다시’ 이별을 선택함으로써 그녀와 새로운 가족들이 만들어낸 불안이라는 안개를 걷어낸다. 그녀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고 그녀의 진짜 엄마는 디즈니월드에서 그녀의 손을 놓았던 사람이 아니라, 그녀를 애타게 찾으며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이는 미화도 합리화도 아니다. 그저 ‘성실한 반복’을 통해 얻은 진실이고, ‘온전한 환대’의 출발점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특출나거나 대단하지 않지만 대체로 성실하다.
「나이트호크스」의 ‘나’와 「뜰 안의 볕」의 ‘늘봄’은 스스로가 비겁하지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들이 질문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았는가’이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았는가’에 가깝다. 현실에 부딪히며 성치 않은 마음을 겨우 붙들고,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기를 반복한다 가끔은 스스로의 비겁함을 직면하는 순간 속에서도 그들은 후회하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다시 질문하고, 질문해가며 다시 방향을 찾아갈 뿐이다. 무엇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는지는 결코 선택의 순간에 알 수 없다. 먼 훗날 그때 그 선택이 미친 영향과 결과를 요모조모 따져보고 나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선택에 대한 평가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몫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평범한 나는, 그저 성실하게 길을 헤매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고통받을 수 있을 뿐이다. 알 수 없음이 두렵고 방황이 불안하게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문지혁은 9개의 장편 소설에서 평범하지만 성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들은 모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미래도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살아간다. 그저 방황과 고뇌의 순간을 피하지 않고 성실하게 겪어낼 뿐이다. 길을 잃어야 한다면 충분히 헤매이고 회피하기보다는 고통 받기를 택하는 그들의 아픔이 아름답다. 그리고 그럼에도 성실히 지금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이 책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그렇게 모두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며 책을 덮었을 때, 결국은 나름대로 애쓰며 고민하고 고뇌하는 아름다운 나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