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 두 돼지 이야기
필 비셔 지음, 저스틴 제라드 그림, 정모세 옮김 / IVP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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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ney & Norman : A Tale of Two Pigs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아이들이 방학이라 아침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그림책 하나를 읽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읽기 전에 책표지에 그려진 두 돼지 그림을 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말쑥하고 당당해보이는 노먼(Norman)과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흐트러진 차림의 시드니( Sidney), 아이들은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다가 넷다 만장일치로 "시드니!" 쪽을 택했다.
정말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아이들은 참 다양하다. 노먼처럼 모범생 아이가 있다. 규칙을 잘지키고 늘 칭찬받는 아이. 상받는게 익숙한 아이가 있다. 우리 집에도 그런 녀석이 있다.
학교에선 선생님께 이쁨을 받고 집에서도 칭찬을 받는다. 노먼은 어디서나 인정받는 착하고 훌륭한 돼지이다. 노먼은 궁금하다. 왜 다른 돼지들은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조금 더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자기만큼 훌륭한 돼지가 될 수 있을텐데, 왜 노력하지 않는걸까?

반면 시드니는 부족한 점 투성이다. 성실하게 일도 처리 못하고 어딘가 뒤쳐져있고 옷차림마저 단정치 못하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어렵고 서툴다. 사람들이 자기한테 실망하고 짜증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가 실망스런 시드니. 하나님도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실 거라고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돼지 앞으로 초대장이 배달된다.
하나님의 초청이 담긴 편지였다.
어떤 장소로 찾아오라, 너에게 할 말이 있다는 메시지였다.
이 초대장을 받은 두 돼지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노먼은 상받으러 가는 기분으로 잔뜩 들떴고, 시드니는 혼날까봐 두려웠다. 마치 벌받으러 교장실에 불려가는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노먼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갔다. 하니님은 그를 기쁘게 맞이 하셨고 따뜻하게 바라보셨다. 그리고 "사랑한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노먼이 훌륭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또한 슬픈 목소리로 노먼의 교만을 지적하셨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넌 착하지도 훌륭하지도 않다.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너보다 못한 다른 돼지를 깔보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하셨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들도 사랑한단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네가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노먼은 충격에 빠진다. 노먼은 주위를 쳐다보며 '내가 적어도 쟤들보다는 낫잖아?'라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자기가 다른 돼지들을 깔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 말씀이 맞구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돼지였어!'
난생처음 자기가 나쁜 돼지라는 인식이 들었다. 자랑스러웠던 자기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편 시드니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혼날 각오를 한 채 하나님 앞에 갔다. 그를 맞이한 하나님은 참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세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여기까지는 노먼과 똑같다.
그런데 둘째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셋째도 똑같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시드니는 그제야 하나님의 온화한 눈빛을 보게 된다. 따뜻한 그 분의 눈빛이 시드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드럽게 덮어주는 것만 같았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다. 나도 이런 나를 사랑할수 있을까? 어쩐지 용기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그냥 가볍게 읽은 두돼지 이야기, 아이들 동화가 요즘 나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정리해 주었다.
최근 나의 화두는 "교만과 겸손"이었다.
삶이 내게 준 교훈은 "교만하지 말라"였고
'어떻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 수 있을까?'로 마음에 번민이 일어날 정도였다. 가슴을 치며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구하는 것만으로 교만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나의 반듯함이 자랑거리가 되고 누군가의 연약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차라리 좀 부족한 편이 더 낫다. 그렇다고 시드니처럼 헛점 많은 삶이 좋은 것이 아니다. 노먼처럼 훌륭하고 착한 삶이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오히려 시드니의 연약함이 더 낫다는 것이다. 노먼과 시드니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떠오르게 한다. 기도하러 성전에 나간 두 사람의 태도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했던 바리새인과 저 구석에서 가슴을 치며 은혜를 구했던 세리.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자랑스러워했던 바리새인이 아닌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며 엎드렸던 세리를 더 의롭다고 하셨다.

온전한 삶, 바른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맞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자세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를 이해해야 한다. 착한 돼지의 반듯한 일상은 사랑을 받기 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분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이미 그분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네 삶이 칭찬으로 가득 채워져 있든 꾸중으로 가득 채워져 있든 상관없이, 네가 모든 시험에서 100점을 맞든 아무리 열심히 해도 60점밖에 못 맞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너를 똑같이 사랑하신단다."
정말 그렇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우릴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기꺼이 그렇게 하실 분이다.

책 뒤편에 있는 부모를 위한 <이 책을 자녀들에게 읽어 주려면> 부분 글도 참 와닿는다.
"...우리 아이들이 선생님이나 어른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가장 선한 의도를 지닌 부모로부터 받는 메시지들은 아이들을 교만에 이르게 하거나 좌절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도록 몰아갈 수 있다...."
가슴이 철렁해지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칭찬조차 아이들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한 메시지를 준다는 것, 늘 명심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아이들의 성공을 칭찬할수록 아이들은 불행해진다. 아이들의 가치가 그들이 행한 일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아이의 존재에 집중하고 아이 자체에 소중한 가치를 두고 사랑하는 일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다. 부모 자신의 관점이 달라져야 가능한 일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누군가를 흘겨보며
'쟤는 왜 저래?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군.
참 답답해.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라는 마음이 든다면 인정하라. 당신은 교만하다.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나의 잘못을 보여 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만약 당신이 부끄러움과 좌절 속에 숨어 있다면 "너를 사랑한단다" 거듭 거듭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 사랑의 메시지를 들을수 있도록 구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길에서 떠날 수 있도록 구하라.

사실 우리는 노먼일 때도 있고 시드니의 모습도 있다. 교만과 열등감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인간이란 그렇게 일관성이 없고 복합적이다. '죄'라는 근원은 같지만 나타나는 모양은 다르고 혼합되어 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노먼이든 시드니든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 자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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