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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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계몽주의 철학과 이마누엘 칸트의 저작

 

제 2장 이마누엘 칸트

 

Ⅰ. 생애, 인품, 저작 1724 ~ 1804

 

1781년에 출간된 칸트의 첫 번째 주저 『순수이성비판』은 유럽 계몽주의 운동을 완성시킨 동시에 좀 더 높은 단계에서 극복한 저작이다.

 

Ⅱ. 비판철학 이전 시기

 

칸트가 대학을 다니고 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독일의 지배적 철학 체계는 라이프니츠- 볼프 사상이었다. 이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독단적 방법의 합리론이다. 합리론이란 내 이성이 세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곧 진리라고 보는 이성철학이다. 이때 이성은 타고나는 것 (본유적)으로, 경험의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독단적 합리론자들은 실제로 이성이 경험과 무관하고 경험을 초월하는 인식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서 먼저 비판적 검토를 해보지 않았다.

 

칸트 역시 독단적 합리론에서 출발했지만,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경험론의 선구자 로크는 지성에는 감성에 의해 미리 주어지지 않은 것이란 전혀 없다고 했으며, 흄은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경험만이 우리 인식의 원천이고 한계이기 때문에,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학문인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한편에서는 합리론을,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론을 주장한다. 칸트는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려면 먼저 참다운 비판적 방법을 동원하여 ‘전체 인간의 사유기관이 지닌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57세에 마침내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Ⅲ. 순수이성비판

 

여기서 이 책이 요약하는 『순수이성비판』의 개념을 다시 축약․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해될 내용이면 『순수이성비판』이 어렵다는 소문도 없을 것이다. 8~9년 전인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다. 지인의 지인이 쓴 책이고 비교적 쉽다고 해서, 호기심을 갖고 읽었는데 그때도 어려웠다. 12가지 범주에 관한 설명을 보며 생각했던 것은, 철학자란 이렇게도 꼼꼼한 인간인가 싶었다. 예전말로 밑 닦은 휴지까지 모을 놈 같았다. 칸트야 워낙 그 방면으로 유명하긴 하다.

 

순수이성비판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궁금했던 것은 순수이성과 비판의 관계였다. 순수이성이 비판을 하는 것인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칸트라면 계몽주의의 정점이고, 계몽이란 놈은 이성을 신처럼 떠받드는데,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가 이성이 누리는 신적 지위가 과연 합당한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성 자신을 법정에 세운 것이 칸트 비판체계의 출발이다. 칸트에게 ‘비판’은 면밀한 검사나, 검증 한계 규정의 의미를 갖는다.

 

『순수이성비판』의 중심물음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세분하면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특수학문이다. 여기서 순수이성이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를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이성을 말한다. 이 책에 비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책의 의도가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원천 및 한계를 비판적으로 판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의 모든 원리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다. 초월적이란 개념은 경험의 피안이나 경험을 넘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란 의미를 갖는다.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이다.

 

칸트는 물 자체 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은 언제나 감관이 내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만 내게 ‘현상’ 한다. 현상 배후에 있는 것, 즉 물 자체 (칸트는 예지체 noumenon라고도 부른다)에 관해서 나는 알 수 없고, 그 한계를 절대로 뛰어 넘을 수 없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물 자체의 존재를 인정했다. 헤겔 혹은 지젝에 의해 해석된 헤겔은 이 물 자체를 현상 안으로 들여왔다. 물 자체는 현상 너머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현상 너머의 그 무엇,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실재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지젝에게는 현상이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다. 실재를 현상으로서의 현상 혹은 현상의 틈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지젝은 칸트와 헤겔의 차이는, 어쩌면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라고 한다. 칸트가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 밖에 밀쳐놓은 것을 세계 안의 틈, 부정성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물物에 대해 사과를 사과라고 어떻게 동일하게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물 자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 열두 범주들이 초월적 판단력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의 인식능력 덕분에 우리 모두는 사과를 배가 아니라, 사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 인식을 따른다! 칸트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아래서는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개념들에 의거해 이루려는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한 번쯤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해 보고 그렇게 하면 형이상학의 과제를 더 잘 다룰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도 시도해 봄직한 일이다. 그러한 가정은 (...)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더 훌륭하게 합치한다. 이런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 사상과 마찬가지 의의를 갖는다. 코페르니쿠스는 전체 별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가정에서는 천체운동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자 관찰자를 회전시키고 별들을 정지시키면 더 나은 설명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p618"

 

코페르니쿠스는 옛날부터 참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프로이트뿐 아니라 칸트까지도 코페르니쿠스에 자신을 비유하다니!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물이 실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도는데도 여전히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일상은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칸트가 말하는 세계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나 한번 고민해 보고 말 일이다. 가끔 적외선 카메라 따위가 세상을 비춰줄 때, 이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나의 인식이 보여주는 세상이다. 어떤 다른 감관과 다른 지성을 갖춘 생물체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있긴 있는 것 아닌가? 무언가가 없다면, 감각을 촉발 하는그 무엇이 없어도 세상이 현상할 수 있는 걸까? 진짜 매트릭스처럼?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몇 단계의 도구가 필요하다. 감성, 지성, 이성이 그것이다. 감성은 외부의 그 무엇으로부터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개별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표상을 직관이라고 하는데, 오직 감성만이 직관을 제공한다. 지성은 열 두 범주를 사용하여 직관의 재료들을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성은 다양한 개념과 판단을 다시 결합하여 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이성은 이런 통일화 활동에서 자기통제에 실패할 때가 있다. 다양을 단지 상대적으로 더 높이 통일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한 통일성을 산출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이성은 하나의 무조건자를 추구한다. 이 욕구를 이끄는 것은 ‘지도적인 이성개념들’ 즉 이념이다. 완벽한 통일성을 추구하다보면 필연적이게도 최초의 원인인 신의 이념에 다다르게 된다. 신에 대한 이념은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은 불가능하다. 순수이성의 감관으로 직관할 수 없다. 신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도 없고 반증될 수도 없다. 칸트는 우리의 (이론) 이성의 한계에 대해 질문한다.

 

“그 한계는 가능한 경험 지식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과 일치한다.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에 관해 이성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성은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이념들 -이것들이야말로 칸트에게는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그런 이념들을 반증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한에서 그것들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p622”

 

Ⅳ. 윤리와 종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정언명령일 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준칙이 뭔지 모르면서도 대충 때려잡아 멋진 말로 기억한다. 원래 언어란 그렇게 문맥 속에서 감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깐깐하기로 소문난 철학자들에게는 정확한 개념 정의는 탐구의 출발점이다. 일상어와는 다르게 쓰여,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개념들도 꽤 있다. 칸트는 ‘개별적 인간의 행위에만 타당한 원칙’ 을 준칙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은 내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내가 당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행위만 하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정언명령이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명제를 말한다. 이론이성의 명령은 강제적 성격인 반면, 실천이성은 요구적 성격이이다. ‘마땅히 어떠어떠하게 행동해야 한다’ 고 하지만, 요구하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령과 같다. 명령은 따를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보편적이고 조건 없이 타당한 것은 어떤 특수한 객체에 근거할 수 없다. 보편적 실천 법칙은 객체 즉 질료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만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칸트가 발견한 원칙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모든 경험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언명령이 그렇게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긴다면, 보편타당 할 수 없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도 ‘언제 어디서나 옳고 좋은 것’ 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옳은 것은 반대편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오늘 좋은 것이 내일은 싫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언명령이 임의의 모든 내용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sollen이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정언명령은 우리가 그것을 준수할 가능성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우리에게 그것을 따를 자유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칸트는 여기서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실천의 가능성, 실천의 자유는 이론이성으로는 결코 입증할 수 없다. 다만 실천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인간은 윤리적 행위를 할 때 현상으로서의 사물 세계를 벗어나 초감성적인 세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인간은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를 획득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윤리법칙에 대한 의무를 강제한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현상의 영역에서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이루는 모든 것은 거대한 필연적 연관 속의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 즉 초감성적인 자유의 영역에서 속해 있다.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롭고 더욱 큰 경탄과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위의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 (.....) 처음 것,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군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은 사라져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고 나면 자신을 이루었던 질료를 행성에 돌려줄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예지적 존재자로서의 내 가치를 내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드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 법칙이 내게 현시하는 것은 동물성은 물론 전체 감성 세계와 무관한 삶이다. p630~1”

 

 

Ⅴ. 판단력 비판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된 것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다.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자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을 이어주는 연결 매체다. 판단력은 한편으로 지성이 궁극목적을 염두에 둔 체계적 자연고찰을 수행하도록 도와주며, 다른 한편으로 실천이성으로 하여금 목적의 관점에서 현상을 고찰하게 하여 세계의 윤리적․ 이성적 궁극 목적에 대한 윤리적․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한다.

 

세 비판서 모두에서 칸트는 보편성과 필연성, 즉 합법칙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우리에게서 연원한다. 우리가 세계에 법칙을 이식한다. 그러므로 법칙들을 발견하려면, 세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탐색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우리 인식 능력의 선험적 형식에서 유래한다. 행위에서 합법칙성은 우리 욕구 능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세상만물을 목적의 관점에서 판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Ⅵ. 비판철학 이후의 저작

Ⅶ. 칸트에 대한 비판과 평가

 

는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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