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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전에는 화려한 수상 이력을 광고하는 책이 나오면 ‘음 대단하군…’하고 감탄한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나도 모르게 오디션 심사위원 모드에 빙의해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보게 된다. 우리나라 상도 아니고(그렇다고 우리나라 문학상을 잘 안다는 말도 아니지만) 외국의 문학상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저런 상을 받았다고 꼭 나한테까지 감동적일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종이 동물원’도 처음에는 그렇게 삐딱하게 본 책이었다. 저자가 쓴 머리말을 펼치기 전까지는.
“내 신경세포 속에 변화하는 활동 전위들은 특정한 배열과 유형과 사유로 분출한다. 그들은 내 척수를 타고 흘러내려 내 팔과 손가락으로 갈라져 들어가고… 사유가 동작으로 번역된다. 키보드의 조그마한 지렛대들이 눌리고, 전자들의 배열이 바뀌고, 종이 위에 기호들이 찍힌다.”
자신이 번역가이기도 한 작가라서일까? 글쓰기를 신경 세포의 움직임에 의한 번역으로 해석하다니, 이 사람 좀 특이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읽어본 첫 번째 단편 ‘종이 동물원’은…
아 진짜..... 이렇게 사람을 울려도 되나 할 정도로…. 끝에 가서 울컥 눈물이 나버렸다.
스토리 자체가 종이 접기처럼 차곡차곡 접혀가다가 마지막에 활짝 펼쳐지는 느낌?
주인공인 ‘나’는 중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미국인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카탈로그에서 샀다’고 나오는데, 보니까 우리 나라에도 있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국제결혼을 한 것 같다. ‘나’는 어릴 적 어머니가 접어준 종이 동물(마법이 깃들어 살아 움직이는 종이 동물)과 행복하게 놀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로부터 멀어진다. 영어도 서툴고 외모도 주위 사람들과 다른 어머니한테서 멀어져 ‘미국화’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에게서 멀어진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오래전 버려두었던 종이 동물(호랑이)를 발견하는데, 그 속에는 어머니가 남긴 말이 들어 있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다시 살아난 종이 호랑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중국 현대의 역사가 압축된 것만 같다.
첫 단편이 이렇게 감동적이라니 다른 단편은 어떨까 하고 읽어봤는데 이건 뭐랄까…
종합선물 세트?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이렇게 신기하고 아름답게 쓰다니 참 대단하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은 처음에 요괴 사냥꾼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해서 여우 요괴(‘후리징’인데 우리나라 전설의 구미호 같은 존재)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스토리가 흘러가면서 점점 묘하게 바뀐다. 서양(아마도 영국)이 중국을 침략해서 철도 공사를 하던 시대, 스토리의 배경이 중국 어느 지방에서 홍콩으로 바뀌어 진행되면서 주인공 커플의 스토리도 장르 자체가 바뀐다. 증기 기관차나 증기 기관 시술자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 했더니, 마지막에는 아예 ‘스팀 펑크’ 장르로 마무리되어 버린다.

스토리 내내 ‘관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던 캐릭터가 ‘권능’의 향기를 갖게 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살짝 끼쳤다. 이 단편도 또한 실제 식민지의 역사를 살짝 비틀어서 쓴 스토리인데, 읽다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헷갈리게 되는 점이 신기하다.
그런가 하면 ‘파자점술사’라는 단편에는 타이완(대만)의 현대사가 소재로 등장한다. ‘파자점’이 뭔지 사전을 찾아봤더니 ‘한자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하여 길흉을 점침. 또는 그런 점’이라고 한다. 책에는 실제로 한자를 써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추’, ‘의’, ‘화’ 같은 한자 몇 글자로 중국과 타이완 역사(미국도 함께)를 무슨 옛날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간다. ‘한자 판타지’라고 해도 될 만한 신기한 이야기다.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의 삶 자체가 복잡하고 비극적이지만, 마지막은 어린 세대(그것도 다른 나라 아이)에게 무언가 전해지는 듯한 감동이 있다.
SF의 성격이 강한 이야기들도 많은데, 켄 리우라는 작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머리말의 이 부분인 것 같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남은 이야기들이 이미 읽은 이야기보다 많아서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신인 작가를 만났다는 것이 정말로 기쁘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작가는 오랫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