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 전집 12
프로이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고, 모든 것을 성욕과 관계 지으려는 그런 해석에 도덕적 윤리를 보탠 학자들도 있지만, 부자간에서 발생되는 대부분의 갈등은 쌍방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통 혹은 인생의 교훈이랄 수 있겠다. 부건 자건 인생을 한번만 살아보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경험이 없는 것으로서는 양쪽 모두에게 교훈으로 남겨져야 하는 기록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자식에게 전이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예비한다는 핑계를 두어 자신의 인생을 대리로 살게 하려는 의도로 인하여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인 도덕과 규범으로 포장된 교육이란 방식으로 주입되는 결과로서, 가족이라는 구성의 시간성으로 놓고 본다면 문명 이후에 이어져 온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족이라는 군집에서 사회와 국가라는 집단으로 이어질 사회의 집단 심리가 나중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일 것 같다. 그렇다면 결코 같은 시간과 환경으로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희망 또는 과오를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재연하도록 요구하거나 또는 희망이라거나, 사회적인 완성도라는 이름으로라도 얻고자 하는 것은 일방적인 이기심이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부자간에 있어서 정신의 상속은 마치 달과 손가락의 관계처럼, 혹은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야기처럼 삶의 도구를 쥐어주는 것 보다는 도구를 만들거나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영화배우 Will Smith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아이를 영화에 출연시키더니 이제는 그 아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를 제작해 공급 상영케 했다, 제작 예산이 130,000,000 $ 이라는 거액 정도는 자신들의(부부가 제작에 참여) 아이의 희망을 위하여는 과감하게 투자를 해도 좋다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과연 그 아이에게 도구로 작용할지 아니면 허망한 꿈에 불을 지핀 꼴이 아닐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영 아니올시다 였다고 하겠다. 영화 평론가들은 이미 자식도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내가 본 이 영화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르는 듯 보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상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자아와의 싸움을 과거의 기억이 무의식으로 잠재되어 있음을 영상화. 그리고 공포란 뇌의 사물에 대한 기억의 착각일 뿐 사실이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주입시키는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영상화.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긍정적인 관람태도라고 보여질 것이며 투덜거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뭐 그런 의미에서 가정내의 가훈이라든가 삶의 지침을 보여주는 의미라면 막장드라마나, 그저 피 튀기는 좀비 류의 영화나, 성적인 영상만을 다룬 영화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지만, 어쩌면 자기들이 소파에 앉아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거액을 들여 영화로 만들다니…… 돈은 역시 만능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그 사정을 이해할까?

영화의 제작노트에는 부자간의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다듬어 시나리오화 한 결과라지만 그것을 실행했을 때 과연 현실적인 의견이 가족애를 누를 만큼 돈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을까 의문스럽다.

압축시킨 도입부를 풀어 본다면 나는 전설이다가 될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의 시작 부분에는 지구에 살던 인간의 파멸과정을 짜깁기 영상으로 대체한 것은 그렇다 치고, 지구를 떠난 인간들이 또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적을 스스로 만들어 위험을 자초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에 대한 함축성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인간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는 지구상의 동물들의 모습은 굳이 진화라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1천년동안 자신들의 천적이 사라진 환경에서 살아온 것이라면 인간을 죽이라는 유전화의 동기가 어딘가에 도입부의 영상처럼 설명화 되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테마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요즘 인문학의 하나인 심리학과 뇌 생리학이 떠오른다. 프로이트가 이론으로 내세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전제적인 아버지상을 넘어서는(살해한다는 표현으로……)자식들의 성장이 문명과 인간 자아의 성장 모습이라고 하였듯이, 영화 속에서도 부친은 전제적이며 아들은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달리기에서 부친의 기록을 넘어서는 것으로 콤플렉스를 넘어선다. 프로이트의 표현이라면 부친을 죽이는 것이 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부친이 전제적인 것은 나르시시즘을 의미하기 때문에 집단의 존경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복종을 요구할 뿐이라고 했는데, 그 이론 그대로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시공의 터널을 잘못 들어서 지구로 추락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영화의 주제는 이미 거기에서 끝이며 관람자로 하여금 그럴 듯한 영상을 보여주어 주제를 더 미화하던가, 암시 속으로 묻어버리는 그림은 없다. 자식이 스스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도구를 쥐어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끝없이 간섭하려는 부자 관계, 그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 300의 성인식과 같은 인상을 주는 Ursa와의 싸움은 표절 같아 보인다. 그는 그렇게 하여 자신의 부친을 완전히 넘어서고 성인으로서 자아를 찾는다고 봐야 한다.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려면……

 

영화 속의 부자가 실제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인한 부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징징대는 모습이라던가, 부대의 특급전사과정에서 탈락하는 과정부터 지구로의 추락 과정을 거쳐 조난 신호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친의 조언에서 벗어나려는 이유까지 내 생각으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고, 공포의 대상과 맞서는 장면이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소년 판 “Sucker Punch”와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는 ‘Sucker Punch”가 더 기억에 남는다. 심리학적인 면에서의 설명은 나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보여지지만 그 영화에서는 음악이 영상과 잘 맞았다고 생각되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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