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평범한 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형편뿐 아니라 세상사 전반에 대해서도 숙고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특정한 지위를 갖고 태어나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일 뿐, 

당면한 현실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거의 들짐승만큼이나 본능적으로 순간순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선견지명도,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면 삶의 조건이 통째로 바뀔 수 있으리라는 통찰력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환경을 지키려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테고 

사회는 오히려 본인이 환경을 보존하려는 계층에 속한다고 믿고 싶은 사람의 수가 더 많을 것 같다. 

Robert Trivers는 자기기만 이론에서, 우리 정신은 자신의 능력을 이중으로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부터 속여 남들에게 더욱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무의식에서는 진짜 능력을 인지하고 스스로 그 현실에서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환경이 보존, 발전되어야 한다고 믿고자 하는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어쩌면 사회를 은밀하게 움직인다는보이지 않는 손이 범위를 정해 놓았을 것 같은 분류에 속하여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이 적용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중산층으로 보이고 싶어하면서 내심으로는 중산층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계층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구분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러셀이 말하는 선견지명이나 통찰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현실적 압박에 가로 막혀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많을 뿐이지…… 

그렇게 현실이 이상을 억누르는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누구에게나 비로서 세상의 고민이 보이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 시기란禮記(예기)≫ 曲禮篇(곡례편)에 구분한 것처럼 사람이 나서 10년을 말하여 ()라 하고 이때부터 글을 배운다. 

스물을 말하여 ()이라 하여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갓을 쓴다. 서른을 말하여 ()이라 하여 가정을 이룬다.

마흔을 말하여 ()이라 하고 사회나 국가를 위하여 관직에 나서는 벼슬을 한다.

쉰을 말하여 ()라 하고 비로서 정치에 나서 官政(관정)을 맡는다며 삶의 흐름을 정의하였고, 

《위정편(爲政篇)》에서 마흔까지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여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가 되면서 지천명(知天命)이라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聖人)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때가 그 시기로 세상의 고민과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만의 해결책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 전에는 보이고 들리지 않던 세상의 이러저러한 계층도 보이고보이지 않는검은- 도 보인다고 느끼곤 하며, 

귀로 듣는 미디어의 뉴스나 광고가 절반을 차지하는 신문들을 보면서도

“거대 신문사를 경영하려면 큰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요 매체의 소유주는 자본가 계급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들이 자기 계급과 다른 견해 및 전망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어떤 뉴스를 일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 뉴스를 왜곡할 수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뉴스 자체를 주의 깊게 선별하여 독자의 감정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극하거나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부조리를 알면서도 뭔가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그간의 세월 동안 세상에 복종하는 제도 속을 살아온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참하고 치사한 기간이지……

 

그런 강압적, 위선적, 특권층을 위한 제도나 프로파간다로 도배된 미디어를 지배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이들은 두꺼운 벽과 수많은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군중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군중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지나는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시민은 목소리를 높여 다양한 경로로 그들에게 변하기를 호소하였지만 무심했던 입법자들을 뽑게 되는 시기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행복하다고 떠들던 시기를 권력의 교체시기인 그때가 되면  그때서야 자신들에게 호소하던 시민이 보이는지 더 이상 불행한 시기를 살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거공약을 남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선거운동 당시의 열정과 공약은 다만 희미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표자들은 일부 집단이 품은 불만보다는 

이른바전체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것을 정치적 수완의 본질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란 실로 모호하기 때문에 사리사욕과 겹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국민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는 것도 이미 머릿속에, 행동 속에 주입되어 습관화 되었으므로 

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뭔지를 모르게 되고, 

그런 무력함은 

“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하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 받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도 

둔감해하며, 오히려 이중적인 정신으로 인하여 그러한 악행이 머지않아 자신들을 위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게 되는 것 같고, 그로 인해 교과서에서 주입된 교육이 현실과 많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보적일 수 밖에 없는 

젊은 인생들과 명석한 사리판단으로 이미 그러한 부조리를 알고 있던 개혁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구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다. 

본인은 애국적보수라고 믿고 있겠지만……

세상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그 고민의 덩치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입법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그 동안 몰랐던 것을 갑자기 다 알아버리는 것 같은 그 고민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미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되어 버려 육신을 갉아먹고 있는 암세포처럼 퍼져버린 자유의 압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생각하는 자유란 신체의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물론 신체의 자유마저도 우리에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세상의 아무 곳이나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의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있는가? 국가라는 경계선에 막혀 갈 수 없는 곳이 지구상의 국가에 얼마나 많은가!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마저도 허락을 받아 기간을 정해 놓고 가야만 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다른 시로 이사를 가고자 하여도 제도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제도가 나쁘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자유라는 것이 알게 모르게 그런 제도아래 묶여 있다는 것이다. 제도는 인간의 사회를 마찰 없이 움직이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약속이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오로지 홀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거기에 검은 손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을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맞다 나의 몸은 이념의 벽에 막혀서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 프롬 (Erich Fromm) 은 사람들은 많은 속박에서 해방되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얻게 되면 불안에 휩싸여 자유를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느끼게 되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권위자에게로의 복종을 필요로 하는 노예의식이 파시즘과 같은 정치체제를 원한다고 한다. 따라서 소극적인 자유에서의 도피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율이나 자치로서의 적극적 자유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로의 제도가 권력자에게는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아닐까?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빌붙어 자신의 자산을 늘리려는 자의 탐욕이 합쳐지면 갖은 방법으로 군중이 누리고 있는 통제적 자유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러셀이 말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자들의 세상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 생각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지쳐있는 무력한 삶을 사는, 또 자신의 무력함을 현실에서 소외 당하지 않으려 자기기만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불혹을 넘어 지천명도 넘어서면서 집단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자 비로서 자신을 보게 된 지금. 혼자서라도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세상으로부터 병에 걸린 컴퓨터를 치료해주는 바이러스로 인정 받던 어느 학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그 동안의 길에서 노선을 변경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바라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국가가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도가 자유를 통제하거나 자본이 자유를 속박하는 세상은 아니다.

정부와 법률은 본질 자체가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유는 정치적 미덕 가운데 으뜸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모든 미덕 가운데 최고라는 말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창조적 예술, 사랑, 사색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정치적 조건에도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유는 그 자체로서도 그리고 앞서 말한 다른 미덕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정치 및 경제가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덕이다.’

(5장 국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방법)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나 또는 폭압적인 전제주의 군주이거나 모두 입에 달고 있는 희망은 모든 국민이 잘 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순서에 있어서 어느 길을 따라가는가에 따라 이념이라는 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어느 이념이든 간에 단체가 구성되고 규모가 커지게 되면 모순에 닥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념이나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이 문제라는 것 아닐까?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가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 도구. 제작물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문화의 세계이며, 어떤 수준의 문명이라도 문화는 자연과 엄정하게 대립된다. 모든 인간은 말하며, 도구를 사용하며, 규칙을 지키면서 행동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제도를 먼저 생각하고 자유를 그에 복속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이전에 인간 스스로의 사회성에서 비롯된 문화가 있으며 규칙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사회성과 각 종족의 문화를 침해 당하지 않으려는 자율에 의한 것 아닐까?

자연과 대립적인 구조로 보는 것도 서양의 인식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연과 동화하는 것이 아닌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도 제도아래, 관습아래에 두고 통제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이며 살아오지 않았을 텐데 지금과 같이 되어버린 이유는 인간이 가진 외로움, 그 외로움에 대한 불안을 벗어나려는 정신의 박약함 때문에 스스로 포기한 것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거나 수천 년을 사람들은 자유라는 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정의하고 모든 인간이 동시에 같은 무게로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유를 누르고 있는 제도나 정부라는 완장을 찬 일부 탐욕적인 인간에 의하여 전체가 속고 있는 채로 또 5년을 외면하고 사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에는 그런 완장을 찬 사람들의 숫자가 백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틀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반 군중에게 자유와 노동과 자본을 가져가는 세력이 늘어남을 말하는 것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0 10 13일자 영국 에 실린 글과 Thomas Paine이 표현한 것이 그 시절, 그가 무엇을 꿈꾸었던 간에 그때나 지금 그 글속에 지칭한 세력이 달라졌는가?

 

사회와 정부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사회는 우리의 욕구에 의해 산출되며,

정부는 우리의 사악함에 의해 산출된다.

사회는 우리의 정서를 통합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긍정적으로 증진시키며,

정부는 우리의 악덕을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부정적으로 증진시킨다.

사회는 상호작용을 고무하며, 정부는 구별을 창출한다.

사회는 후원자이며, 정부는 처벌 자이다. 모든 상태의 사회는 축복이며,

정부는 그것이 설사 최상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필요악에 불과하다. (토마스 페인 상식 1776)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인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국가가 없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자리만 차지할 뿐 쓸데없이 건방진 정치인은 기껏해야 값비싼 사치재에 지나지 않는다.

(3장 국가 아닌 사회)

 

이번 선거에서는 본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북, 종북, 좌파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이념으로 몰아가는 세력이 사라지고 전통과 무절제한 개혁을 조절하고자 하는 사회의 힘을 보수라고 몰아가는 세력 또한 사라졌으면 한다.

 

처음으로 그는 浮世 고민이 자기 자신의 확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The Glass Bead Game (1942)   - Hermann H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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