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 유네스코, 21세기의 대화; 세계의 지성 49인에게 묻다 현대의 지성 130
제롬 뱅데 엮음, 이선희.주재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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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그의 답사기 6번째 책의 본문 첫마디에 한국인의 문화의식에는 이중적인 면이 많다고 했다. 나는 문화의식뿐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그런 면이 많다고 본다. 아이들의 교육에서부터 어른들의 정치에까지 말과 행동이, 정책과 실행이 다르게 나타나는 면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교문 밖을 나서자마자 거추장스러운 행동으로 표현되는 억압으로 반영되고, 정치에서는 만인의 경제적 행복을 위하는 정책을 말하지만 실행에서는 소수의 자산이 넘쳐흘러서 하층민의 생활을 적셔주기를 바라는 실행이 전부이며, 그런 자들을 혐오하면서도 그런 자들이 자선을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누구나 복지의 혜택을 받기를 원하면서 그것에 돈을 쓰는 것에 계층간의 선을 뚜렷이 하여 차별을 없애자고 하는 것은 이념이라고 몰아세우는 이중성,

이제 지나가는 정권이 자신들 스스로는 만족할만한 경제점수로 평가하는 것과, 새로운 당선자 자신도 그 정부의 일원이었으면서도 스스로 실패한 정부라고 말하는 이중성,

그 정부의 처음에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했음에도 내년에 공무원 수가 백만 명이 되어 간다는 점과 같은 이중성.

 

그렇게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근소한 차이로 정권을 연장하게 된 이유를

미디어에서 분석하기를 20대가 취업이나 Spec문제에 시달리느라 사회에 둔감해지고 50대가 쓸데없이 과거에 매달리는 듯한 진보당에 질렸다는 식의 분석을 내놓지만 그것은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저 기사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그 미디어들은 사회가 이념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들, 미디어라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냥 어느 정부가 되던 자신들의 핍박한 삶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하여 알기 때문에, 과거 5년전에도 장밋빛 사회를 약속했었던 실패한 정부의 연장을 다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또 한번 속아주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속아준 이유로는 아마도 외신에서 말하는 독재자의 딸이 그의 부친과 같이 살았던 그 시대, 그때도 역시 이중적인 면으로 독재에 몸을 바쳐 반항했던 젊음도 있었지만, 그런 시절에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지금의 대기업을 이룬 젊음들이 지금 사회의 지도층인 것처럼,

어두운 그림자만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반대 세력은 어두운 면만 부각시키려는 것에 짜증이 나서, 그래도 뭔가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그 뻔한 거짓말과 자신들이 하면 다르다는 정치권의 그런 이중적인 잣대에 또 속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미디어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선거란 아마도 조직적으로 잘 꾸며진 커다란 쇼를 통해 자신들의 연예인을 뽑는 것 같다는 미국의 유권자를 향한 어느 인문학자의 분석처럼, 우리나라도 TV에서 방영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처럼 그 쇼의 출연자들에게 인기 투표를 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미지화된 인기인을 뽑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정책은 누가 내세워도 정책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겉보기에 보기 좋고 장밋빛 향이 나는 화려함을 내세우는 세력을 쫓아가는 것이 요즘의 선거라고 생각한다. 즉 정책과 국가의 미래를 위하는 등의 이러쿵저러쿵하는 정책,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나 실현 가능성 등에 대한 검증은 미디어에 의해서 각색된 각본에 의하여 그저 연예인의 스캔들처럼 취급하고 알아채려 하지도 않는다. TV에서는 그런 점을 이용하여 막대한 광고수익을 걷어들이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투표를 독려하는 시민단체의 구호와는 달리 투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에 몇 번 있었던 혁명의 시절처럼 시민의 혁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적당히 위에서 흘려주는 물을 받아 목을 적시는 것에 익숙해 있거나 자신이 실제로는 6명중의 1명에 속해있으면서도 시끄러운 혁명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 계층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자유민을 한군데로 가두어 놓는 국가란 태생적으로 모순, 이중적인 위선과 가면으로 갇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정부가 그런 모태에 기생하고 있는 숙주라서 그 속에 갇혀 사는 자유민이란 위선과 모순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중성을 키우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유라고 알고 있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중적인 면을 모순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모순에 빠지게 마련이고 그 모순에서 성급히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해서는 안됩니다.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말을 우리의 이중성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수천 년 동안 통합된 문화를 바라고자 하였으나 전혀 통합되지 않는 동서간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분열이라는 것으로 투사하여 공포로 반응하게 하는, 그래서 통일이라는 정책으로 강제하여 묶어놓는 것이 성급히 아등바등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 그런 측면이 조금이라도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금처럼 매번 선거 때마다 국토가 태극모양으로 구분되는 것을 문화라는 측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급히 벗어나려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국토의 동서 측은 적어도 천년 넘게 다른 문화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통합된 정치권아래에 있었다 해서 문화가 같지는 않았음에, 심지어 말까지 다른데 같은 민족(정말 단일 민족일까?)이라고 해서 같은 색을 보여줄 이유가 있는가?

나는 그래서 결과가 같은 매 번의 선거 방송을 본 다음 날 동료들과의 한잔으로 제 정신이 아닐 때에 늘 하는 말이 있다. 다시 삼국시대처럼 신라 백제, 고구려로 나누어야 한다고……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자극적으로 반발하는 북쪽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90년 여름에 독일을 여행했을 때 듀셀도르프의 거리에 동독의 젊은이들이 조그맣고 낡은 차에 가득 타고 흥분된 얼굴로 창문을 연 채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고 그때 본 그들의 웃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만약 그들처럼 내가 그런 이념에 갇힌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아니면 그보다 더 몇 년 전 아프리카에 갔을 때나,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처럼 의복과 먹을 것이 충분치 못하고 안락한 집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나 행복을 주지 못하는 국가란 어떤 의미일까?

 

 

국가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역사적 형태일 뿐이며 추상적인 만큼 야만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상 모든 나라에서 폭력과 강탈, 노략질의 결합을 통하여, 한마디로 전쟁과 정복을 통하여 태어났고, 여러 나라의 신학적 환상에서 연속적으로 만들어진 신들 또한 이와 함께 했다.

국가는 그 기원에서부터 야만적인 힘과 거리낌 없는 불평등의 신성한 결함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권위이고, 국가는 힘이며, 국가는 힘의 과시이자, 그것에 대한 심취이다.

국가는 환심을 사려하지 않고 바뀌려고도 하지 않으며(중략), 선한 것을 명령할 때 조차도 그것을 방해하고 망쳐놓는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며, 모든 명령은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도덕, 즉 인간적인 도덕(명백히 신성한 것이 아닌)의 관점에서 보면 선은 그것이 명령된 순간 악으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이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바라고 사랑해서 선을 행할 때 거기에 자유와 도덕, 인간적 존엄이 함께 존재한다. 3장 자유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들 87p-미하일 바쿠닌 신과 국가의 미완성유고 인용

 

토머스 페인이 상식에서 정의한 말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이 말이 요즘 시대에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한편 국가 또한 이제껏 정부와 혼동되어 왔다, 정부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국가 폐지가 아니라 정부 폐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따금씩 주장되어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국가와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표상한다. 국가는 정부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는 사회보다 더 높은 권력의 존재뿐 아니라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 또 사회생활의 여러 기능을 소수 또는 구성원 전체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을 함께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내포하기도 한다. <크로프트킨, 국가론>p1635장 국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방법

 

나는 이러한 의견에 공감의 비율을 정의한다면 70%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적인 주장에, 사회주의자적인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념이든 간에 모든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다수가 전부의 권리를 지닌다는 생각은 다른 모든 도그마가 그러하듯이 절대적 진리가 결여된 것이다. 강력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조차도 자칫하면 가장 우수한 시민들, 다시 말해 진보의 동력이 될 자주정신의 소유자들을 쉽사리 억압하곤 한다. 94p 3장 자유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들

 

자주정신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을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생각이 무엇에 견주어 경험적으로 옳을 수는 있다. 또한 선험적으로 옳고 그릇된 것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사회의 안정을 바라는 자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율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아가 타자에 의하여 의지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주정신인가?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성스런 체함을 그만두고 아는 체함을 버리면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익 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에게 이러한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회가 어우러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21세기에 소국과민을 이룰 수 있을까?

동남아의 폴포트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정권을 몰아 내고 노자의 그 뜻을 따라 농민정권을 만든다며 도심을 해체하고 사람의 수를 강제로 줄이고자 결과적으로 “Killing Field”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을 무너뜨린 정권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이었다고 한다. 결국 역사란 시간이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맞는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비록 위선과 모순을 자양분으로, 자유를 자본으로 포장하고 있는 정부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언젠가는 다른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시간에만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혹 촛불을 들고 나오는 시민단체의 주장처럼 목소리를 내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세상이란 이세상에는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이것은 좋은 혁명일까요, 나쁜 혁명일까요? 사실 이는 우리가 마치 5세기 전 여기에 둘러 앉아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고,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묻는 것과 비슷하다. 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것. 여러분들은 이것이 좋은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오, 아니면 나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역사상의 거대한 경제적 시대들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들이 동시에 소란스럽고, 도전적이며, 흥분되고, 무시무시하고, 불안정하며, 방향을 잃은, 유토피아적이며 디스토피아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을 위한 혜택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에 대한 착취가 있으며, 아마도 인류를 위한 전진 도약이 있는가 하면, 환경에서의 퇴보가 있다. 이것들은 혼란 상태이다. 251p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이지만 모든 사회의 특성이나 환경이 자신을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존재.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아나키즘이나, 프롬의 휴머니즘적 사회주의, 러셀의 길드사회주의 등의 각종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은 개인에게 많은 도덕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록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율을 강제하는, 바쿠닌이 생각하는 사람이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바라고 사랑해서 선을 행할 때 거기에 자유와 도덕, 인간적 존엄이 함께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개인들의 모임이 된다면 노자를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이 고민한 국가론이 될 것 같다. 어떤 식의 ‘ISM’이든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도덕성을 실천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욕망을 누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요구되는 사회라면 그것이 과거의 잘못된, 그래서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그런 도덕을 정의하는 것이 자본의 양으로 결정된다고 보여지므로 아나키즘 등의 주의보다 오히려 국가나 정부에게 개인을 통제하기 쉬운 방식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는 어째서 그 탄생지를 비롯한 유럽의 학자들에게 의심을 갖게 했을까?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결과만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잔인성의 결과 때문에 본인들이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들은 역사적 인간학을 잘못 알고 있다. 사실 상업은 하나의 파생물이고 문화의 수혜자인데도, 그들은 상업이 문화의 창시자라고 믿는다. 사실은 문화가 상업과 정부가 의존해 있는 수원인데도 그들은 상업이 1차적 제도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상업적 관계들을 맺고 그 뒤에 하나의 문화를 창조한 역사적 사례를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사람이 먼저 정부를 만들고 그 뒤에 문화를 세운 역사적 사례를 하나라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제3의 길 정치를 통한 계몽주의 때문에 잘못 알고 있다. 상업은 창조자가 아니라 수혜자이다. 하지만 수혜자가 시혜자를 식민화할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문명은 그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263p 접근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문학과 지성사 2010

 

이제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세상은 스스로 조율하며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사회는 이번 선거에서도 미디어에 의하여 또다시 이미지로 양분되고 세대별 분석이라는 신종 분석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문화는, 짧은 시절의 정치 격랑 속에서도, 비록 유홍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중적인 면이 많았더라도, 수천 년 동안 견뎌온 것이 아닐까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미지로 갈갈이 찢겨진 시민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스스로 알지 못할 정도로 어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각각의 진영은 퇴근 후의 술자리 등에서 보수는 속도를 조절하며 진보는 새로운 개혁으로 사회의 진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발전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 보아도 될까?

Mayor may adopt 'coop' system

여기에 덧붙여서 내가 어설프게 생각하는 한가지는 나와 같은 세대들을 모아 협동농장을 운영하는 게 어떨까 한다. 각 시의 한군데만이라도 무엇인가(가령 생필품이나 기초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나, 특산품을 재배하는 농장 등)생산을 하는 농장. 혹은 공장 혹은 볼로냐의 ‘COOP System’을 활용한다면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노동력으로 보다 나은 경제를 이루지 않을까?

매번 뭔가 대형 프로젝트만을 운영하려 한다거나 지금도 거미줄 같은 도로 등의 기반시설에 투자하여 도심만 거대하게 되는 원치 않는 이중적 결과를 낳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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