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상징 -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37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까치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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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런저런 행동을 매일매일 하게 되고

그 행동의 결과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거나 파괴되기도 하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만족하는 보상을 받을 때까지 행동을 수정 보완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학자들은 학자의 방법대로 기술자는 기술자의 방법대로 정의하게 되는 것이 학설이고

이론이며 도그마로 발전되고 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수 천년 동안의 순환 과정이 신화를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고 과학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겠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간의 어떤 차이가 전쟁을 만들어 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차이란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그들이 처했던 동 시간대의 다른 공간에서 발생하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식이전에 무언가 있다면 그것은 의지일까? 아니면 본능일까?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아니면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결론은 그런 행위로 인하여 경험을 얻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인식을 만들어내며,

그 인식은 의지를 만들어내는 순환의 결과가 역사라는 것 아닐까?

태초에 있었던 것은 logos 이거나 이거나 관계없이 행위를 이루어 낸 것이고

그 행위가 경험을 주었고

그 경험은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개념은 종족간의 상징과 이미지를 만들어 낸 그런 것 이라고 생각된다.

 인류라는 종이 두각을 나타내는 한 가지 지적 능력은 정의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다른 어떤 능력에 힘입어 우리가 그 순간의 격변을 배제해 버리기 때문에, 상상력은 실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스티브 미센은, 인간이 대상을 타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 사람. 사건 사이의 관념 연합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 .. .. 다시 말해 관념 연합을 형성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란, 내 식으로 말해, 사람과 사물, 기타 모든 것을 경험의 견지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즈레인스토리 9장 가장 뛰어난 뇌의 조건

 그런데 그 근원인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서 이루어지는 것인 것?

심장인가 뇌인가?

런 질문은 오래 전에 사라진 질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심리 깊은 곳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곳에서 인간의 본원이 시작되는가가 해부학적으로는 결론이 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다른 의미로 숨겨져 있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사람의 심장이 정지되면 뇌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5분안에 뇌는 활동을 정지하고,

심장을 다시 살린다고 하더라도 PVS(persistent vegetative state)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심장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심장은 움직이고 신체의 기능은 정지상태가 아니라도 인지능력이 없고 인식불가능 상태라면

생명이 뇌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꼭 어느 한곳으로 정해야만 한다는 그 강박 증 같은 개념자체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문제는 생명이 어느 곳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생명이 무엇을 상상하고 실천하는가 아닐까?

상징을 사용하는 이런 능력, 나아가 바로 옆에 있는 대상도 상징적 어휘로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인 것 같다. 다른 영장류나 유아들도 막연한 지능을 사용해

조어(proto-language)라고 하는 것으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지만 두 살이 지나면 오직 인간만이

시각적 단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복잡한 문장을 조립해낼 수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생리학자

William Calvin은 우리가 이렇게 문장을 조립해 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무한한 개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고 창안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첫째, 우리는 사물을

다른 사물의 상징으로 본다. 둘째, 우리는 은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브레인스토리 10장 말하는 뇌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유화가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사유화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욕망이 본능을 넘어선 것이라는 증거일 테고……

 

상징적 사고는 아이들, 시인, 정신착란 증 환자만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상징적 사고는 인간 존재와 공존하며, 언어와 추론적 이성에 선행한다.

상징은 다른 인식 수단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심오한 양상들을 밝혀준다.

이미지, 상징, 신화는 마음이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 창조물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필요성에 응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 기능은 존재의 가장 내밀한 양상을 숨김없이 드러내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미지, 상징, 신화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여러 조건과 아직 타협하지 않은

생긴 그대로의 인간을 한층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적 존재는 모두 역사 이전 인류의 많은 부분을 자신 속에 품고 있다.

이점은 실증주의가 한창 혹심하던 시기에도 사람들이 결코 잊은 적이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 형제인 동물과 똑같이 본능에 의해서 규정되고 지배 받는 동물이라는 것을

실증주의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이미지와 상징: 서문/ Mircea Eliade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역사주의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칸트로부터 최근의 역사주의적,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실현된 사변의 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구체적, 본원적 존재로서 인간은 상황속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아버지의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 속에서 실현된다. 또한 그것은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일반의 행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인간 일반이란 추상일 따름이다. 그것은 우리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존재한다.

이미지와 상징 제 1중심의 상징

 미국의 철학자 존 설이 지적한 것처럼, 현재의 의식 상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과 의식이

전혀 없는 것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설의 말을 들어보자맹시 연구는 정말이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나는 맹시 연구만으로 의식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과 맹시인 사람의 차이점을 검토함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맹시 연구는 언제나 의식이 있는 피험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맹시를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의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

285p 11장 의식의 수수께끼

 

요즘 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Incognito”와 같이 그 동안의 생각들이 부질 없는 것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수 많은 철학자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의식하는 뇌와 의식이 없는 뇌의 차이가 무엇 인가이다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사고에서 드디어 자유를 맞게 되는 의식의 전환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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