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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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벼운 책은 아니고 고전에서 따온 모티프도 많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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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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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으로 변용되고 재창조된 동화들의 단편 모음집. 원래 '나쁜 동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냉큼 사서 읽었다. 하나 같이 밝은 얘기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암울하게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작품들이 마음에 들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왕자와 하인리히의 관계 및 하인리히의 심리에 대해 고찰해보는 게 재밌었달까. 게다가 원제는 '개구리 왕 또는 강철의 하인리히'란다. 이 원작에 대해서는 읽어본 바가 없어서 모르겠긴 하지만, 아마 심장에 얽힌 강철로 된 사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품이 강철 같아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강철'을 '맹목'으로 바꾼 까닭은 역시 왕자에 대한 하인리히의 태도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일 텐데. 개구리로 변한 왕자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본인이 고통스럽게 죽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왕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하인리히. 대체 왜? 소설에서 하인리히는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라는 식으로 둘러대지만 나는 하인리히 자신조차 속아넘겼던 그의 숨겨진 진심을 엿보고자 했다.

왕자가 급한 대로 선택한(것으로 보이는) 철 없는 어린 공주, 그녀에게 왕비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게 하인리히에게 진짜로 중요한 사항이었을까? 그가 누누이 말해왔던 대로 왕자의 저주를 풀기 위해 본인 목숨이 희생되는 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왕자의 최고로 '효율적인' 선택에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있었을까? 군말없이 고된 여정을 보좌해온 자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왕자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혹시 공주를 죽임으로써 왕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복수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봤는데, 어떻게 보면 본인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왕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하인리히의 태도가 바로 '맹목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렇다. 왕자에게 복수하려고 했다면 왜 왕자 그 자신이 아니라 새로 들이면 그뿐일 왕비를 처치했단 말인가.

하지만 왕자에게 끝내 가 닿지 못할 하소연을 구구절절 내뱉는 듯한 하인리히의 서술이 무언가 원한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그녀가 내게 어찌했는지를 목격했고,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반응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심장이 깎여 나가는 나의 죽음이 개죽음만은 아니라고 증명해 줄 테지만, 그 깊디깊은 침묵이 당신의 대답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요.

p.58 

 

그러니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1. 하인리히는 본인의 죽음보다 장차 왕비가 될 여자의 자질을 더 신경쓸 정도로 왕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한다. 2. 얼핏보면 하인리히가 맹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빙빙 돌려가면서 왕자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며, 공주를 죽인 것도 왕자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다. 아무리 그래도 차마 왕자를 직접 죽일 수는 없었을 수도 있고, 왕자를 직접 죽이는 것보다는 저주를 푸는 열쇠가 된(바꿔 말하면 하인리히의 죽음의 원인이 된) 공주를 죽이는 게 더 그럴듯한 복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번도 일리가 있는 게 공주의 행동거지나 태도를 살피는 하인리히의 시선이 꽤나 섬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주에 대한 본인의 살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밑작업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뭐.

또 한 가지 재밌는 건 왕자에 대한 하인리히의 태도다. 맹목적이라고 하면 흔히 왕자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으로 묘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왕자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진다. 그럼에도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데서 오는 굳은 신뢰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했다. 예를 들자면 마녀였던 왕비의 약속을 저버린 일에 대한 하인리히의 서술이 그러한데, '남자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추후에 다시 한 번 그 일을 지적하면서도 왕자를 마냥 망나니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나는 내 주인이 그렇게까지 무책임하고 인내심 부족한 분이라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곁에서 쭉 지켜봐온 하인리히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왕비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일은 왕자의 본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예외적 상황'이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면 왕자의 대한 하인리히의 깊은 신뢰를 설명할 방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하인리히가 왕자에게 커다란 신뢰를 보내는 것에 비해(그러나 하인리히가 잘못을 지적하는 일도 잦으므로 왕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하인리히를 대하는 왕자의 태도는 거의 가축을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하인리히 또한 왕자가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는 그 점에 분명히 상처받고 있다. 이 지경인데도 하인리히의 살인을 맹목적인 충성으로만 해석한다면 이를 설명하기 위해 생략된 에피소드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 정도로까지 느껴진다. 왕자가 알고보니 온몸을 바쳐 충성할 만한 주인이었다든가. 아니면 하인리히에게 매저키스트 기질이 있었다든가.(...)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을 접어 두고 다만 저주를 푸는 조건만을 당신에게 밝혔을 적에는, 더구나 저주가 풀린 다음 이어질 나의 운명에 대해 함구했을 적에는, 어찌 마음에 한 조각 동요나 갈등마저 없었을까요? 사실을 말했다면 당신은 조금쯤 망설였을까요? 실은 그까짓 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코웃음 치실까 두려워 숨기고 있었답니다. 정말 두려웠던 것은 그 코웃음마저 감사히 여길 나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p.45

 

'태어난 날부터 내 몸과 마음은 당신께 바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이십년 전 선대 왕이 취하신 몰락 귀족의 다락방에서 태어난 날부터 나는 당신의 충신이 될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내게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 운명은 흐르는 맑은 물에 씻기고 다듬어진 둥글고 매끄러운 조약돌처럼 단단했습니다.'

정말 이 몇 개의 문장들이 왕자에 대한 하인리히의 맹목을 설명해주는가? 그는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이미 왕자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한쪽 눈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왕자의 해방과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할 얄궂은 운명... 보답 받지 못할 충성의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만 하는 운명. 그 운명이 대체 뭐길래?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제스처는 단지 얼마든지 대체물이 존재하는 왕비를 죽이는 일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어딜가나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한 채 이렇게 붕 뜨고야 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엘제가 처한 상황은 내가 보기에도 갑갑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독서는 엘제의 눈과 마음을 기어이 깨우고야 말았으니... 그녀에게는 삶 또는 죽음, 이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억지로 살아가거나 자유롭게 죽거나. 엘제의 부모가 딸을 도시에 보내서 공부시켰다면 양상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만을 기대할 수도 없다. 물론 적어도 그물에 갇혀 있다가 햇빛에 녹아 사라지는 결말을 맞지는 않았겠지만.

현실주의자들에게 엘제는 어리석게만 비춰질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뭐하나?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불행을 자초하고 마는데, 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선택이 마음에 든다. 현실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람이 무조건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써야만 하는가? 그러기를 거부하고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엘제도 현실에 적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현명한 행동이랄 수는 없다. (일부러 저항하려고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과도한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만들어 공동체에서 고립시킴으로써 사람을 강제로 틀 속에 끼워맞추는 야만적인 행위(그물에 가두기)를 자행해야만 했는가? 엘제의 행동은 꼭 처벌받아 마땅한 것이었는가? 

'거기 엘제 있어요?'라고 거듭 물으며 끝내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은 엘제의 행위는 '저항의 퍼포먼스'와도 같다. 남편의 집이나 이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자신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점의 확인. 그곳의 엘제는 당신들이 원하는 평범하고 일 잘하고 애를 낳아주는 어떤 여자일 뿐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나는 버터처럼 녹아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의 사물화, 그리고 소멸.  

평소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이런 결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녹아 없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고 감각하고 인식하는 버터, 이 세상에서 성립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은유인가.

전체적인 감상보다는 특히 마음에 들었던 두 가지 이야기 위주로 써봤다. 이야기 중간중간 성경에서 따온 모티브도 자주 등장하던데, 비록 지금은 무신론자지만 한때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을 또 한 번 다행스럽게 여기는 바다. 성경에 대해 알아둬서 나쁠 건 없거든. 객관적인 거리만 유지한다면 말이다.

아, 마지막으로 언급할 게 하나 있다.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에서, 이 부분은 꼭 가룟 유다를 연상시킨다.

 

 

당신의 시야가 다시 맑게 개기만 한다면 배신자의 오명을 쓰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밤이란 이토록, 마음속에 그리는 이에 대한 충심과 경애가 깊어지면서 동시에 의혹과 원망과 모종의 음모가 신생되기도 하는 양극의 시간인 듯합니다.

 

p.55-56

 

아마 이 구절에서 유다를 떠올린 건 내가 유다 덕후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서도, 원래 맹목적인 충성과 배신은 동전의 양면 아니던가? 신뢰가 너무 깊었던 나머지 실망도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고 결국 배신으로까지 이어지는. 말마따나 배신이라는 건 신뢰 위에 세워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배신은 곧 양가감정, 애증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충성스럽기에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는 점이 일부 관점에서의 유다의 배신과 아주 흡사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만약 왕자가 공주를 죽인 범인이 하인리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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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미로
발터 뫼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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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 발터 뫼르스 이제 신작 안 쓰는 건가 하고 혼자 슬퍼하고 있었는데 꿈책도 후속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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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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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강렬하긴 하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랫 분 말씀대로 단순히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 여성의 몸과 생각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드는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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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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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소설적 상상력으로만 그려낼 수 있는 위대한 인간의 생애. 예수에게도 유다에게도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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